막부 시대 3대 풍운아 낳은 중세 역사가 숨쉬는 땅, 일본 중부 미에현을 가다
입력 2010-08-11 21:15
일본의 속살을 제대로 맛보려면 열도 한 가운데 위치한 중부지방을 빼놓을 수 없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풍요로운 자연, 역사 깊은 사적지가 즐비한 중부지방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저가항공사인 제주항공이 지난 3월에 개설한 김포∼센트레아 국제공항 노선이다. 매일 1편씩 운항하는 제주항공을 타고 센트레아공항에 도착하면 공항 청사에서 직접 연결되는 카페리호 선착장까지는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카페리호를 타고 이세만을 30분만에 건너가면 행정 구역은 아이치현에서 미에현으로 바뀐다. 미에현 이가 지역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닌자의 발상지로, 17세기 일본의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이 가을 나는 왜 나이를 먹는 걸까 새들은 구름 속으로 숨고” 촌철살인의 시 한 수를 읊조려 본다.
일본에서 가장 짧은 한 글자 이름으로도 유명한 ‘츠’시를 관통하면 18년 전에 세워진 닌자민속촌에서 에도 시대 닌자로 분장한 배우들의 검술 시범을 볼 수 있다. 닌자들의 배웅을 받을 즈음엔 해도 기울어 다시 바쇼가 남긴 방랑 규칙을 떠올려본다. “같은 여인숙에서 두 번 잠을 자지 말라. 아직 덥혀지지 않은 이불을 청하라.”
숙소는 이세만에 접한 도바시 해안가가 제격이다. 여장을 풀 때쯤 여행이란 게 문득 여행자를 심연으로 몰고 간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떤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사진 밖에 있는 어떤 것에 더 신경이 쓰이거나 어느 골목길에서 떠돌이 개를 만나면 자아가 서로 통하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도바인터내셔널호텔엔 히로히토 일왕 가족이 묵은 적이 있다는 증표로 그의 사진을 망원 렌즈로 잡은 거친 사진들이 크게 확대되어 객실 통로에 몇 점 붙어 있다. 일왕이 이 호텔 로비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전망대에 서 있는 사진이다. 1957년에 지어진 이 현대식 호텔에 일왕은 쇼와(昭和) 46년, 그러니까 1971년에 가족들과 함께 투숙했다.
이세만이 내다보이는 전망대에 서서 그는 태평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왕과 욱일승천기를 떠올리며 전망대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50분. 10여분 쯤 기다리자 멀리 떠 있는 두 개의 섬과 섬 사이에서 옅은 해무를 헤집고 붉은 한 방울 피가 살갗에 비치듯, 손가락 끝을 바늘로 콕 찍었을 때처럼 따끔하면서 우주의 온 신경세포가 한 곳에 집중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빛과 열의 거대한 압력으로 대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양이 머리를 내밀었다. 우주의 분만 주기에 따라 잉태된 태양은 마침내 지구라는 분만대에서 그 머리를 들이민 것이다. 일본 일왕의 일출과 떠돌이 개의 일출과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뭇 시선들의 일출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 중부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행 중에 가끔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암전 상태를 경험하는 수가 종종 있듯 우리는 살면서 시간과 공간을 혼동하기도 한다. 그게 여행이 안기는 심연이기도 하다.
여행은 이세신궁으로 이어진다. 일본에 산재한 10만여개의 신궁 가운데 개국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은 가장 규모가 크고 신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은 이세신궁 참배를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 삼는다고 한다. 신궁은 200년 이상 된 히노끼(편백나무)로만 지어졌으며 지금도 20년마다 신궁을 옮겨 짓는 천궁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목재를 다루는 장인의 솜씨가 수백 년 동안 전승되어 온 것도 천궁 덕분이다. 옛 막부시대엔 전국 각처에서 도보로 이곳에 당도한 참배객들이 노잣돈이 떨어지면 신궁측에서 며칠 씩 공짜밥을 먹여줬으며 이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고안된 음식이 모찌다. 지금도 이세신궁 앞의 상점 거리엔 유달리 모찌를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1707년에 창업한 아카후쿠(赤福) 본점도 이곳에 있다. 무더운 날씨 탓에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가게 앞에 뿌리는 ‘우치미주’는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어 정겹다. 상인들도 이렇듯 정갈한 마음으로 손님을 맞는 곳이 또한 일본이다.
해발 1212미터인 미에현 고자이쇼 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 케이블카(로프 웨이)를 탔다. 정상 부근의 능선을 공략하는 등산가들은 물론 겨울에는 정상에 있는 스키장까지 가려는 스키 마니아 등 연간 55만명이 이용한다고 한다. 마지막 코스는 미에현과 접경을 이루는 아이치현의 나고야 성이다. 나고야 성은 대하소설 ‘대망’의 배후지이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막부 시대의 3대 풍운아가 모두 나고야 출신이다. 그런 만큼 나고야는 일본에서도 기가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중세 일본의 역사가 숨쉬는 중부지방을 둘러보고 숙소에서 온천욕을 하는 것으로 일정은 끝나간다. 일출은 어느덧 일몰로 바뀌고 어느새 달이 뜬다. 바쇼의 하이쿠 한 수로 여행을 마무리한다. “문어잡이 항아리여 덧없는 꿈을 꾸는 여름밤의 달”
나고야=글·사진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