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연숙] 동물원에서의 회항

입력 2010-08-10 17:57


말복이 지나기 무섭게 밤공기가 제법 차가운 게, 이제 여름도 끝이 보이는구나 싶다. 더위로 지치는 몸을 달래기 위해 잠시나마 인천을 다녀온 게 여름의 짧은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며칠 전, 송도의 한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크루즈를 타기 위해 월미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크루즈는 1시간30분 동안 월미도를 출발하여 인천대교를 돌아오는 코스다. 호텔에서 크루즈 티켓을 받을 때 내심 영화 ‘러브 어페어’에서나 봄직한 우아한 분위기의 깨끗한 크루즈를 기대했다.

하지만 크루즈는 기대와 달리 그냥 큰 배에 불과했다. 난생 처음인 사람들과 같은 곳을 출발해 같은 목적지를 돌아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영 어색하다. 많은 사람 가운데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의 수학적인 확률을 생각하면 기이하기까지 하다.

높은 곳에서 멀리 내다볼 요량으로 크루즈 맨 꼭대기 4층으로 올라갔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갈매기가 낮게 바람을 타며, 배와 나란히 달린다. 등 너머로는 조선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앞으로는 러시아계로 보이는 남자들이 지나간다. 뿌연 공기와 배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냄새에 지쳐갈 즈음, 시계를 보니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1시간이나 더 배를 타야 한다.

3층으로 내려오니 4층과는 사뭇 다르다. 엔진 소리가 요란하고,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배 안에서는 라이브 공연이 있었고, 밖에서는 사람들이 새우깡을 던져 갈매기를 유인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편들과 젊은 외국인 부인들, 어린 아이들이 여럿 보인다. 또 장애를 지닌 듯한 엄마를 모시고 나들이 나온 딸도 보인다.

2층 매점으로 들어가니 모니터가 러시아 여자들이 교대로 나와 춤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 1층에 마련된 카바레 실황이 생중계되는 것이라고 한다. 별천지다. 보면 볼수록 미처 모르던 세상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아니, ‘동물원의 탄생’에서 봤던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있었다는 인간동물원에 들어온 느낌이다.

눅눅한 바람을 쐬며,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가 떠올랐다. 기름 냄새, 소음이 커질수록 배의 밑바닥이 점점 궁금해진다. 자유를 위해 배의 밑바닥에서 겪어야 했을 공포와 두려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바리데기는 환상을 택했던가.

어느새 1시간30분이 지났다. 배는 이미 인천대교를 돌아 월미도 선착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첫 크루즈 경험은 끝나는가 싶었지만 이 기억은 잘못된 것이었다. 몇 년 전 스코틀랜드 네스호에서, 그리고 바로 이곳 인천에서 작은 배를 탔었던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기억은 이렇게 불완전한 것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인간동물원에서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면 무리일까. 회항을 앞두고, 잠시 접어두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즈음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김연숙 출판도시문화재단 기획홍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