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9900원 여행상품의 비밀

입력 2010-08-09 17:47


9900원짜리 초저가 여행상품이 화제다. 왕복 버스요금도 안 되는 가격이지만 싸구려 해외여행상품처럼 옵션을 요구하거나 물건을 강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입장료 면제혜택을 주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치단체장의 환대와 조촐한 기념품도 제공받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싼 가격에 여행도 즐기고 환대도 받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공짜나 다름없는 9900원짜리 여행상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G마켓 등 포털사이트와 여행사 홈페이지에는 9900원짜리 상품과 비슷한 일정의 여행상품이 3만원대에 올라 있다. 어림짐작으로도 9900원짜리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는 2만원의 손해를 본다. 하지만 수익을 추구하는 여행사가 적자를 감수하며 상품을 판매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적자는 누가 보전해주는가.

지방자치단체들의 관광객 유치전쟁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언론홍보를 하는 전통적 마케팅으로는 관광객을 대량으로 유치하는 데 한계가 있다. 실적에 급급한 지자체들은 보다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도입했다. 여행사를 통해 관광객에게 여행경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보조금 제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언뜻 보면 9900원짜리 여행상품으로 대표되는 보조금 제도는 모두에게 이익이다. 지자체는 축제 등 실적이 필요한 시기에 여행객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영세한 여행사 입장에서는 지자체가 여행경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니 손쉽게 모객을 할 수 있고, 소비자는 싼값에 관광을 즐길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다. 그러나 보조금 제도는 서로가 제 발등을 찍는 자충수가 될 우려가 높다.

지자체가 여행사를 통해 관광객에게 지원하는 보조금은 세금에서 나온다. 주민들의 혈세를 쓸 때는 명분과 함께 플러스알파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MOU를 맺은 특정여행사를 통해 방문하는 관광객에게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명분은 물론 형평성 차원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지자체는 보조금을 미끼로 관광객들이 특산품 구입 등에 많은 돈을 지출하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행경비 보조금 제도는 장기적으로 여행사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저하시킨다. 몇 해 전 9900원짜리 여행상품을 개발해 히트를 쳤던 모 여행사는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싼 상품에 맛을 들인 소비자들이 그 여행사의 정상가 상품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결국 보조금 제도는 국내여행을 싸구려시장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정상가 상품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등 여행시장을 교란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지자체의 과열경쟁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는 여행사들도 있다. 국내 굴지의 모 여행사는 매주 버스 2∼3대 분량의 관광객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지자체로부터 버스 한 대당 15만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잠시 들러 눈도장만 찍고 가는 인근 지자체로부터도 비슷한 액수의 보조금을 받고 숙박을 하는 지자체로부터는 30만원을 지원받는다.

결국 이 업체가 1박2일 상품을 운영하면서 챙기는 보조금은 버스 한 대당 60여만원. 소비자에게는 보조금을 지원받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정상가를 받으니 보조금은 고스란히 여행사의 몫이 되는 셈이다. 여행사의 상술도 기가 막히지만 혈세를 물 쓰듯 하는 지자체의 도덕불감증도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올해 ‘대충청 방문의 해’를 맞아 인터넷에는 유난히 충청지역을 방문하는 9900원짜리 여행상품이 넘쳐나고 있다. 방문의 해를 맞아 책정된 홍보 및 마케팅 예산을 보조금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문의 해가 끝나는 내년부터는 보조금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고 보조금에 의존해 충청지역 방문상품을 개발한 지자체와 여행사들은 싼 맛을 본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보조금으로 왜곡된 국내 여행시장의 정상화가 시급하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