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도 ‘정부 주도 경제개발’ 팔 걷었다… 금융위기 이후 美·佛·日·英 등 적극 추진
입력 2010-08-08 18:59
‘기업전용 대출기금 설립’ ‘제조업 생산증대 5개년 계획’ ‘의료·문화·항공 산업 지원대책’….
개발도상국의 경제정책이 아니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들이 최근 발표한 경제정책이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8일 세계 경제위기로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개도국과 후진국에 혹독한 경쟁과 개방, 민영화를 강요했던 선진국들이 이젠 자국 경제성장을 위해 이 같은 개발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이 됐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한국 STX가 인수한 생나제르 조선소를 깜짝 방문했고, “미래형 선박 건조를 위해 투자전략펀드(FSI)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프랑스 정부는 지난 3월 향후 5년간 제조업 매출을 25% 늘리기 위해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를 눈여겨본 영국도 12억 달러 규모의 FSI를 설립, 기업의 연구개발 비용을 직접 지원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차원에서도 신산업 진흥정책을 마련, 연말에 발표할 예정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고향인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환경과 에너지 분야를 미래 성장산업으로 선정하고 이 분야에 15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부도 위기의 GM과 AIG는 국영화하고 소기업을 위한 전용 대출기금도 설립했다.
선진국들이 경제개발에 적극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보다 금융위기 이후 취약해진 세계경제 때문이다.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정부가 지출을 늘려서라도 경제를 되살려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어느 분야를 살리고 어떤 기업을 포기할 것인가를 정부가 결정하게 되면서 1980년대식 경제개발 정책이 되살아나게 됐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과정에서 선진국들이 한국과 중국에서 빠른 경제성장을 가져온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을 참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지난해 12월 한국이 정부 차원의 세일즈를 통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자로 공사를 따낸 것에 충격을 받았다. 원자력발전 산업의 1인자라는 자존심을 구긴 일본은 시장자유화에 치중해온 정책을 전환, 지난 6월 환경·의료·문화·로봇·항공 등 5대 분야에 대한 산업 지원책을 발표했다.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다. 세계경제가 위기 상황을 벗어나면서 기업 실적은 되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은 제자리다. 새로운 수요 없이는 본격적인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
프랑스는 지난해 건설장비 모형을 103년간 만들어온 완구업체 메카노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FSI를 긴급 투입했다. 장난감 공장을 중국으로 못 옮기게 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이었다. 같은 이유로 자동차 부품업체 발레오, 알루미늄 제조업체 페치니에를 사들였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른바 녹색산업 분야에서 향후 10년간 일자리 500만개를 창출하겠다는 목표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은 사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과거 반도체산업 개발에 정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8개국 중 한국 대만 미국을 제외한 일본 싱가포르 독일 중국 말레이시아는 모두 경쟁력 확보에 실패했다. 관(官)주도 경제로 유명한 일본은 20년간 침체에 빠져 있다. 메킨지 글로벌의 제임스 마니카 국장은 “정부가 시장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건 잘못된 정책”이라며 “수요를 창출하고 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