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남중] 빌딩 숲 바람도 시원하더라

입력 2010-08-08 19:00

여름휴가라고 해도 서울을 벗어나기는 애초 글렀다. 임신한 아내 덕에 말로만 듣던 ‘도심 바캉스’를 경험하게 됐다. 한 주 휴가를 결산하면 이렇다. 책 4권을 읽었고, 영화 2편, 뮤지컬 1편을 봤다. 양가 부모님을 찾아뵀고, 시내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문병했다. 요즘 어디가 아프시냐고 여쭈었더니 98세 외할머니께서는 “이젠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고 하셨다. 한껏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점심을 먹으러 성북동이나 삼청동, 이태원을 찾아다녔다. 밤에는 캠핑용 의자를 들고 한강에 나가거나 버스를 타고 남산에 올랐다.

산책하듯 가만가만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더위를 식힐 만했다. 사람과 자동차가 빠져나간 도시는 헐렁했다. 시야가 트이고 소음이 줄어드니 괴물 같던 거대도시가 제법 친근하게 다가들었다. 해가 떨어지면 콘크리트 빌딩 숲 사이로도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아쉬운 게 왜 없을까. 계곡 사이를 흐르는 얼음 같이 차가운 물과 뼛속까지 서늘한 산바람이 간절하고, 깊은 밤 텐트를 튕겨대는 빗소리가 그립다. 바닷물에 풍덩 몸을 담그고 싶고, 시골길을 달리다 차를 세우고 복숭아며 옥수수도 사먹고 싶다. 여름에 도시를 떠나야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 분명 있다. 그러나 도심 속 피서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충분히 쉴 수가 있다. 어딜 멀리 가느라 힘 빼고, 인파 속에서 경쟁하느라 땀 흘릴 필요가 없다. 바가지요금에 마음 상할 이유도 없다.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머리를 비운 채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며 휴식하면 된다. 푹 쉬는 것이야말로 휴가의 첫 번째 목적이면서, 우리가 휴가지에서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집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새로 발견한 게 많다. 그중 하나는 아내다. 신혼여행 기간을 제외하면 둘이서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눠본 게 언제인가 싶다. 세 끼 밥을 같이 먹고 24시간을 붙어있다 보면 아내가 새로 보인다. 마음속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게 되고, 이때껏 숨겨놓은 말도 듣게 된다. 이번 휴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내가 임신 후 느끼는 우울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어느 책에서 “나이 쉰이 넘어 처음으로 아내의 발가락을 보았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떠올라 아내의 맨발도 유심히 봤다.

날은 앞으로 한참 더 더울 모양이다. 멀리 못 나간다고 속 태우는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도심 바캉스, 꽤 매력 있다.

김남중 차장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