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풍광, 황톳빛·검은색을 입다… 변시지 화백 5년 만에 개인전

입력 2010-08-08 17:31


제주 서귀포에서 작업하는 변시지(84) 화백은 ‘폭풍의 화가’로 불린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초가집과 조랑말과 사나이가 마치 연극무대의 조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화폭에 옮긴 그의 그림들은 요동치는 격랑의 시대를 스쳐지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주의 혼’이라는 별명도 가진 변 화백이 서울 남대문로 롯데백화점 본점 에비뉴엘 9층 롯데갤러리에서 5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1932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민을 떠난 그는 스물두 살 때인 47년 일본 문부성 주최의 ‘일전’에 입선하고 이듬해 일본 화단을 대표하는 ‘광풍회전’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49년 도쿄 시세이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그는 57년 영구 귀국한 뒤 서라벌예대(중앙대 전신) 교수 등으로 활동하다 75년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 지금까지 줄곧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폭풍이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황톳빛과 검은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변 화백은 그림 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이었다. “제주 공항에 내리니 태양빛이 아주 강렬했어요. 그 강렬한 빛 때문에 모든 것이 누렇게 보이더라고요. 제주도를 색으로 표현하면 누런색이 아닐까 싶었죠. 검은색을 쓰는 건 검은색은 밤, 흰색은 낮 이런 식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귀로, 이어진 길’ ‘거친 바다 젖은 하늘’ ‘모든 일은 갑자기 다가오지만 인간에게도 예감은 있다’ 등 그의 작품에서는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의 풍광이 속속들이 담겨있다. “예술은 그 지역의 풍토에서 나오는 겁니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정열적이었죠.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지방작가들도 풍토에 따라 독창적인 작업을 해야 하는데 서울작가와 똑 같으니 문제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있노라면 왠지 모를 슬픔과 쓸쓸함이 엄습하는 듯하다. “제주는 외로운 섬이에요. 여자가 많은 건 남자가 바다에 나가 풍랑에 휩쓸렸기 때문이죠. 또한 제주는 옛날부터 유배지였잖아요. 그래서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이 나오게 되는 거죠. 제 그림 속 까마귀는 앞날을 예측하는 새로 제주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보면 돼요.”

작가는 최근에도 붓을 놓지 않고 있지만 아무래도 고령의 나이 때문에 소품 위주로 작업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요즘은 20호 이내 소품만 하고 있어요. 그 이상 큰 그림은 이제 못해요. 83세가 넘어가니까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어제까지 그리던 것도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그릴 생각이 안 나기도 하구요. 그래서 요새는 집중력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검은 바다’와 ‘폭풍’ 시리즈 등 제주 작품을 중심으로 49년 일본 활동 당시 작가의 동생을 그린 ‘시관의 상’, 57∼75년 이른바 ‘비원 시절’에 그렸던 창덕궁의 비원 풍경과 자화상 등 30여점을 선보인다. “중앙화단을 떠나 제주에 묻혀 지내는 생활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변 화백은 “아주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며 웃었다(02-726-4428).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