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08-08 17:39
(6) 길을 걷는 사람들
프랑스 파리에 처음 갈 때였다. 업무와 연관하여 유럽의 관련 회사들과 콘퍼런스가 있었다. 회의 후 며칠 쉬다 올 생각으로 아내, 아이와 함께 갔다. 차를 몰고 가는데, 초행이라 적잖이 걱정되었다. 마침 얼마 전에 파리에 갔다 온 후배가 자세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뒤셀도르프를 들를 일이 있어서 거기를 거쳐 파리에 가야 했다. 후배의 안내 덕분에 헤매지 않고 파리까지 갔다.
“뒤셀도르프에서 계속해서 서쪽으로 가면 벨기에고 더 가면 프랑스예요. 벨기에를 빠져나가기 전에 중요한 표지판을 만납니다. 그걸 놓치면 안돼요. ‘나무르’(Namur)! 벨기에를 지났는지, 프랑스에 들어갔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국경 표시인 줄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니까요. 생각해봐요. ‘나무르’, 남쪽으로잖아요! 그래요, 무조건 그 표지판만 보고 계속 남쪽으로 가면 돼요. 그러면 프랑스로 들어가고, 고속도로 1번을 만나는데, 계속 가면 파리예요.”
마가복음 전체를 찬찬히 생각하며 읽었다. ‘길’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표시하며 읽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란 분은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예수가 본격적으로 사역에 나서기 전에 예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다. 요한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소명의 길을 걸었다. 마가복음 1장 2∼3절 기록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예수가 오기 전에 세례 요한이 길을 닦았다. 선배에게 들은 구약의 흐름을 생각했다. 구약 시대 내내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다. 메시아는 히브리말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인데 내용적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주님, 곧 구세주(救世主)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역사의 가시밭길과 고난의 수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믿음이었다.
예수가 요한에게 간다.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9절). 예수는 갈릴리에서 남쪽으로 길을 걷는다. 구약의 예언에 삶을 던진 요단강의 요한에게 간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공적인 소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처음부터 길을 걷는 사람으로 나온다. 마지막 지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고.
요한이 걸은 것은 광야로 난 길이었다. 마가복음 1장에서 13절까지가 한 덩어리인데 광야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외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친다. 예수도 세례 후에 광야로 간다. 거기에서 40일을 지낸다.
‘길을 걷는 사람들!’ 이 표현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나는 멋진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내 삶의 길에서 성취해야 할 것들을 정확하게 계획했다. 순조로웠다.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아내의 태중에 있는 둘째 아이 문제로 거친 광야가 내 길을 가로막고 있다. 광야 곧 황량한 사막 앞에서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길을 어떻게 걸었을까. 그 길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나는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가 걷기 시작한 길로 같이 들어서고 있었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