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의지의 인간? 실험 결과 ‘환경의 노예’… 영화 ‘엑스페리먼트’
입력 2010-08-06 17:49
1971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필립 짐바르도 박사는 ‘환경조작에 따른 심리변화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참가자 24명을 죄수와 간수로 나눈 뒤, 가상 감옥에서 생활하게 하며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관찰했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타고나는 것인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알기 위한 것이었다.
애초 2주를 염두에 뒀던 실험은 5일 만에 끝났다. 죄수와 간수 역할을 맡은 피험자들이 현실과 연기를 혼동하며 느낀 극도의 동요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2001년 올리버 히르시비겔 감독 연출의 독일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이 실험을 각색했고, 폴 쉐어링 감독의 이번 영화는 히르시비겔 감독 작품을 리메이크했다.
돈이 필요했던 트래비스(애드리언 브로디 분)와 배리스(포레스트 휘태커 분)는 우연히 대학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실험에 참가한다. 실험 장소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명의 지원자들이 와 있었다. 간단한 심리 면접을 거친 이들에게 죄수와 간수 역할이 나뉘어 주어졌다. 폭력 없이 평화롭게 지내면 실험이 끝났을 때 1만4000달러를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다.
분위기는 첫날부터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간수들은 말대꾸했다거나 밥을 남겼다는 이유로 죄수들에게 벌을 주고, 죄수들은 그런 간수들을 아니꼽게 생각한다. 간수가 된 배리스는 애초 아내에게 큰 소리도 못 낼 만큼 소심한 성격을 가진 데다 죄수 역할을 맡은 피험자들에게도 동정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감춰진 본성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두른다.
실제 실험 내용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다놓진 않았지만, 폴 쉐어링 감독은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바탕으로 치밀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이성과 감정, 현실과 역할 사이에서 점점 한쪽으로 기우는 배리스와 간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제 정신을 잃어가는 트래비스의 연기도 뛰어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실험실 문이 열리는 순간, 비치는 햇살과 함께 제 정신을 되찾은 피험자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그들의 남은 생 그 자체다.
영화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상황이 우리를 만든다면, 우리의 의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선과 악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그대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 섬뜩하다. “인간은 개선의 여지가 있으니까…….” 트래비스의 독백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조 비슷하다. 15세가. 11일 개봉.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