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의 ‘감각’으로 그린 진실… 10년 만에 장편 ‘A’ 펴낸 하성란
입력 2010-08-06 17:51
포르투갈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는 역설적으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눈먼 자들의 잔혹한 도시를 헤쳐 나오는 눈뜬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담고 있다. 소설가 하성란(43)이 10년 만에 펴낸 장편 ‘A’(자음과모음)는 이와 대조적으로 눈뜬 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눈먼 자가 후각과 청각을 통해 전대미문의 집단 자살 사건을 파헤친다. 소설은 ‘보다’라는 동사에서 발로한 1인칭 시선의 성립이 불가능한 신체적 불구성의 구조와 함께 냄새, 음향, 피부 감각이 그 시선을 대체하고 있는 독특한 문체를 보여준다.
소설은 23년 전인 1987년 8월29일, 신도 32명이 한날 한시에 사망한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 삼아 쓰여졌다. 당시 이 사건은 전모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과 추측만을 남기고 종결되었다. 하성란은 이를 시멘트 공장 기숙사에서 24명의 남녀가 역시 한날 한시에 사망한 사건으로 변형시킨다. 시골마을에 시멘트 공장을 세워 단기간에 급성장한 신신양회. 그 기숙사에는 20여 년을 함께 일해온 여자들이 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신신양회 대표인 여자를 ‘어머니’로 부르며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을 낳아 함께 길러왔다. 그들이 어느 날 함께 집단자살한다. 여자 21명, 남자 3명이었다.
언론은 ‘어머니’라는 여자가 남편을 잃은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을 끌어 모아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신흥 종교 교주이며 자살 원인은 신도들의 집단 히스테리라고 추측 보도한다. 그러나 경찰은 증거부족으로 전말을 밝히지 못한 채 사건을 종결한다.
하지만 그날 사건으로 죽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인 서정화의 딸 ‘나’는 사건이 일어날 당시 현장에 있었으나 후천적 맹인인 탓에 눈으로 목격하지는 못했다. 대신 엄마와 이모들이 무언가에 쫓겨 다락방으로 피신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순간을 알고 있다.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무거운 부대자루 같은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둔탁한 것 위에 또다른 둔탁한 무언가가 포개지는 소리가 났다.”(50쪽)
신신양회의 젊은 처자들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남자들을 골라 발신인란에 주홍글씨 ‘A’를 인쇄해 편지를 보낸다.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남자에게 접근해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고 사라진다. 그들의 엄마들이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며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날 때면 자유로이 사랑을 나눈 것처럼, 그들 역시 임신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데 ‘남편’이란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아버지와는 무관한 다른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모들에게 남자들이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거였다. 이모들 또한 바람과도 같아서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았다.”(164쪽)
등장인물과 그 사연들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탄생된 허구임에도 불구,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 때문이다. 현대판 ‘주홍글씨’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은 이전의 하성란 작품과 전혀 다른 서사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문장을 읽어나가면 하성란이 소설을 쓰면서 얼마나 많이 눈을 감고 다른 감각기관으로 세상을 살펴보았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40대로 접어들면서 터닝 포인트가 될 작품이기도 한 소설은 계간 ‘자음과 모음’ 2008년 가을호부터 올 봄호까지 연재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성란은 연재를 시작할 즈음, 사석에서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해 “홀로 어둠 속을 가는 사람처럼 천천히 갈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그 말이 굉장히 절실해요. 이제부터 진짜 속도를 좀 내서 어둠 속에서 가는 사람처럼 써야 진짜 글을 쓸 수 있겠다 싶어요. 안 그러면 그 동안 썼던 몇 몇 글처럼 재능만 있는 글이 될 것 같아서요.” 하성란은 이 소설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