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히로시마, 그 후
입력 2010-08-05 18:09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단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잘 지키고 가꾸어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후세에 전수할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니, 점잖은 동네라도 축하할 일은 축하해야 한다.
함께 등재된 문화유산 가운데 ‘비키니 환초(Bikini Atoll)’가 눈길을 끈다. 서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섬으로 1946년 7월부터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실시된 이래, 3개의 섬을 날려 버린 수소폭탄을 비롯해 67회나 핵실험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 어리석음의 증거로 해저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남아있다.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잘 보존해야 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비키니 수영복이 처음 등장했을 때, 패션계의 충격이 당시 비키니 섬의 핵실험만큼이나 엄청났다고 해서 ‘비키니’라 이름 붙였다는 것을 보면 충격이 크긴 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객쩍은 의문이 생긴다. ‘실험’이 주는 충격이 그 정도였으니, 실제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충격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터, 비키니가 ‘히로시마’가 될 뻔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감히’ ‘차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그 후 히로시마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가족을 여의고 지금도 신음 중이다. 형해만 남긴 채 당시를 증언하고 있는 ‘원폭 돔’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평화의 상징이고, 그 인근은 평화공원이라 불린다.
마침 그곳에 다녀왔다. 원폭의 표적이었던 아이오이다리를 건너 원폭 돔에서 평화의 순례를 시작한다. 당시의 히로시마현 산업전시관, 이 원폭 돔만이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폭의 흔적이고, 그 옆의 오타강이 두 갈래로 나뉘어 이루는 삼각주 지역이 제법 너른 평화공원이다. 원폭희생자 위령비와 원폭 어린이상, 평화의 불꽃, 평화의 시계탑, 평화의 종, 평화의 샘…, 곳곳에서 평화가 절규한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는 종이학과 무궁화, 한반도 지도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에 서기까지의 복잡한 사연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련다. 남과 북, 조국과 이념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로 경의를 표할 뿐이다.
멈춰진 시계, 타다 만 옷, 책가방, 녹아버린 금고, 일그러진 불상…. 평화기념자료관의 ‘유품은 말한다’는 얼핏 폼페이 최후의 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폼페이가 자연 재앙이라면 히로시마는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는 점에서 더 큰 비극이다. 켈로이드와 백혈병, 어린이와 노인, 누구의 상처가 더 끔찍한지, 누구의 염원이 더 간절한지 따질 수도 없다.
앙상한 원폭 돔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65주년이란다. 히로시마의 비극은 과거가 아니다. 그러나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잠시 접어두자. 지금은 기념(記念)이 아니라 기념(祈念)할 시간. 축하할 수 없는 세계유산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영령들이여 평안하기를….
성혜영(박물관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