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양동마을이 어딘고 하니
입력 2010-08-05 17:58
하회마을은 알겠는데 양동마을은 생소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두 역사마을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뒤 나오는 말이다. 하회마을은 탈춤의 고향, 류성룡이라는 걸출한 인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 등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에 비해 양동은 조용한 반가(班家)의 문화가 지배하면서 외부 노출을 꺼렸다. 경주시는 신라유산으로도 차고 넘쳐 조선시대의 문화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민속학자 조용헌이 조선의 ‘베벌리 힐스’라고 부른 양동마을은 경주와 포항 중간쯤에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한 곳이다. 마을의 매력은 고유한 역사와 경관에서 나온다. 600년 전부터 경주(월성) 손씨와 여강(여주) 이씨가 사이좋게, 때론 경쟁하며 유구한 세월을 이어왔다. 손씨는 우재 손중돈이라는 청백리를 낳았고, 이씨는 동방5현 회재 이언적을 배출했다.
두 분이 태어난 서백당(書百堂)은 손씨 종갓집이면서 ‘삼현지지(三賢之地)’로 알려져 있다. 군자 1명이 더 태어날 곳이어서 출가한 딸이 해산하러 찾아와도 산실을 내주지 않는다. 세 번째 인물을 기다려서다. 이씨 집안에 관해서는 연극인 이윤택의 고백이 재밌다. 어린 그에게 ‘경주 이씨 해제공파’로 알려준 이는 부친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회재 집안의 여강 이씨였다. 면 서기가 할머니에게 성씨를 물어 “경주 양동 이가요”라고 답했더니, 막상 기록에는 뒤의 것을 잘라 먹은 것이다. ‘해제’공파는 ‘회재’의 와전이었다.
양동마을은 ‘勿’자형 구조에 언덕과 계곡이 하나로 연결된다. 하늘에서 보면 포도송이가 촘촘히 열린 듯하다. 유학과 풍수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는 문화 때문이다. 가령 마을 앞으로 철로가 지나려 하자 기찻길이 ‘一’자로 이어지면 마을 구조가 ‘血’자로 바뀌어 피를 흘리게 된다며 반대에 나서 기어이 우회시켰고, 초등학교도 드넓은 들판을 놔두고 산을 마주보게 했다.
건물로 치자면 보물과 민속자료가 수두룩하지만 노비들이 살던 20여채 가랍집[假立屋]을 눈여겨볼만하다. 흙벽과 볏짚 지붕으로 냉기나 습기를 막는 생태가옥이다. 언덕 위 기와집 밑에는 으레 가랍집이 딸려 있어 주인의 하명을 기다렸다. 퍼시스 손동창 대표 지원으로 사진작가 황헌만이 1년 동안 촬영한 화보집 ‘송첨(松詹)’을 보면 기와집과 가랍집의 조화가 그림 같다. 이 정도면 하회마을에 꿀릴 것 없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를 만 하지 않은가.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