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엔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입력 2010-08-05 21:24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4분(미국 시간) 조종사 폴 티벳의 어머니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라는 별명을 붙인 B-29기가 우라늄 폭탄을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이 프로젝트의 군사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다. 그로브스가 “당신을 총책임자로 뽑은 것이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글쎄요. 나는 거기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이라고 대답했다. 오펜하이머는 두 달 전인 6월16일 앨라모고도에서 있었던 첫 원폭 실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첫 번째 섬광의 빛이 땅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눈꺼풀을 투과했다. 내가 처음으로 올려다보았을 때 나는 불덩어리를 보았고, 그 바로 직후에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밝고 매우 자주색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쪽으로 흘러와 우리를 집어삼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515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계기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한반도의 열띤 희망을 뒤로 하고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 자리를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혀갔다. 그는 미국 철학협회의 청중들 앞에서 연설했다. “우리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세계를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폭탄은) 사실상 패배한 적을 향해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침략자의 무기입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은 분열하는 원자핵만큼 그것의 근본적인 성질입니다.”(538쪽)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사이언티픽 먼슬리’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 다시 한번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썼듯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연일 언론의 찬사와 더불어 대중의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점차 인류를 향한 경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무시무시한 별명과 달리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피(Oppie)’라는 친근한 애칭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던 자상한 사람이었다. 유복한 미국의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고독한 천재’였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암석 수집, 시 읽고 쓰기, 블록 쌓기 등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12살 때 자신이 관찰한 암석층에 대해 지질학자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한 지질학자는 그가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뉴욕 광물학 클럽 회원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그는 탁월했지만 늘 외로웠다. 체호프 등 어두운 정신세계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에 빠져들었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비극의 주인공 햄릿을 가장 좋아했다. 하버드대를 3년 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불과 38살 때 ‘맨해튼 프로젝트’ 총지휘자로 발탁된다.
리처드 파인만 등과 함께 원폭 개발에 성공, 핵무기 시대를 열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이내 원폭 개발을 후회했고 원폭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적극 반대했다. 그는 핵무기의 존재가 미국과 전 세계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45년 10월16일 열린 이임식에서 41세의 오펜하이머는 단상에서 말했다. “원자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546쪽)
엿새 후인 10월25일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통령에게 말했다. “각하,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551쪽)
결국 2차대전 후 냉전 체제하에서 핵무기에 대한 그의 경고는 의심을 사게 되고 그는 1950년대 마녀사냥식 매카시 광풍(미국을 휩쓴 반공산주의 선풍)에 휩쓸려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조사받아야 했다. 1954년 보안 청문회를 통해 그는 소련과 내통했다는 등의 혐의는 벗었으나 비밀 취급권을 박탈당했고 이후, 공인으로서의 오펜하이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보안 청문회는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이사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주도 하에 다분히 악의적인 고발과 불법 도청으로 오펜하이머의 개인적인 연애사까지 들먹이며 수모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고등 연구소의 모든 종신 교수들이 서명한 지지 공개서한 덕분에 오펜하이머는 후두암으로 1967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언론인 카이 버드와 미국 터프츠대학의 교수 마틴 셔윈은 무려 25년에 걸쳐 100명에 달하는 오펜하이머의 친구와 친척, 동료들과의 인터뷰, 미 연방수사국(FBI) 문서 열람 등을 통해 수집한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해 한반도에서의 핵 대결이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는 시점에서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중요한 가치로 다가온다. 2006년 퓰리처상 전기·자서전 부문 수상작.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