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 한 컷엔 세상 온갖 에피소드가…‘여행의 순간들’
입력 2010-08-05 21:20
여행의 순간들/후지와라 신야/청어람미디어
일본의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인 후지와라 신야(66). 그는 ‘동양기행’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 등을 통해 국내에도 열혈팬이 있을 정도로 독특한 산문 세계를 선보여왔다. 감각적인 사진, 날카로운 통찰, 그리고 철학적 사유로 가득한 글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지만 스스로 말하듯 여행 과정의 즉흥적인 에피소드는 피해왔다. 그만큼 사유와 통찰에 무게를 두었던 것인데 비해 ‘여행의 순간들’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40년 넘게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 경험들 가운데서 가장 즉물적이고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가득 차있다. 그걸 그는 ‘여행의 원석’이라고 언급한다.
“여행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발에 채였던 돌멩이라는 여행의 원석은 언급한 적이 없다. (중략) 내가 이번 여행기에서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미처 꺼내지 못한 원석들을 닦거나 형태를 정돈하지 않고 독자 앞에 그냥 내던지는 것이다.”
여행자는 객지에서 여러 여인과 마주치고 그들은 방랑객에게 뜻밖의 영감을 주곤 한다. 저자도 마찬가지다. 첫번째 산문 ‘산탄총과 여자’는 그가 인도 사창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산탄총을 소지하고 들어선 내용이다. 사창가 사람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총을 보자 뒤로 주춤한다. 목숨을 걸고 이방인에게 맞서는 긴장의 순간, 들려오는 “벌거벗은 인간의 음악”은 저자의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인도 델리의 분위기는 책에 실린 사진에서도 묻어난다. 인도의 여자들이 몽롱한 눈으로 카메라를 쏘아보고 있는 장면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키나와의 한 식당을 운영하는 ‘지르’는 항구 같은 여자로 기억된다. 메밀국수나 우동을 파는 허름한 식당을 지키는 그녀는 산호잡이 어부인 남편이 항구에 도착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안절부절한다. 화장을 짙게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 속에서 묵묵히 생활을 이어가는 여인의 모습 또한 잊히지 않는 단상이다.
한국 관련 에피소드는 우리의 국민성을 반성하게 만든다. 그가 부산 외곽 먹자골목 횟집에서 겪은 일이다. 돌돔을 주문했지만 정작 맛은 일반 돔이었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놀랍게도 아까 주인이 활어조에서 건져 올린 돌돔은 주인이 숨겨놓은 대야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결국 악덕한 횟집 주인은 일본인 관광객에게 머리 숙여 사과를 하고 음식값을 안 받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다. 적군(赤軍·1970년대 활동한 일본의 좌파 테러단체)의 활동이 문제가 됐을 때 그는 일본인 청년이라는 이유로 국내에서 감시당한 일도 있었다. 그는 목포에서 갑자기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들이 자신을 적군파 멤버로 잘못 알고 잡아들인 것이다. 오해가 풀린 경찰은 나중에 그에게 극진한 식사를 베풀었지만 삼엄한 1970년대 한국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에게 홍콩은 혼돈의 도시다. 1966년 홍콩에서 그는 주민들의 일상에서 혼돈의 흔적을 발견했다. 아파트 위층에서 창문을 열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생선뼈를 옆으로 ‘퉤’하고 뱉어버린다. 여기저기서 쓰레기가 쏟아지지만 문제 삼지 않는 도시. 우리가 생각한 이국적이고 세련된 홍콩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음식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발리 섬 우부드 시내 레스토랑에서 만난 ‘구라미’를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거북이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토실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였다. 텍사스에서 먹은 도넛은 맛보다 음식을 준 사람들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경우다. 텍사스 허름한 음식점에 들어간 그는 도넛을 사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가게에 버젓이 도넛이 있는데도 팔지 않자 그는 인종차별 때문이라고 오해를 했다. 하지만 그건 하루 전 만들어놓은 도넛이었다. 이밖에도 쿠바에서 밝혀진 ‘마초 파파’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숨겨진 에피소드(‘헤밍웨이의 집’) 등은 이 여름, 아직 여행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