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이런 총리 저런 총리

입력 2010-08-04 17:44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4월쯤 고건 국무총리는 총리실 기자실을 폐지하려던 정부 방침에 난색을 표했다. 그는 국정홍보처가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기자실 5곳을 통합하려고 하자 총리실 기자실을 청사 10층에 존속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은 통제되지 않은 권력이며 검증되지 않은 권력” “기자들과 소주 마시며 헛소리 하지 말라”며 언론을 백안시했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기자실 통합이 추진됐기 때문에 강심장이 아니고는 반기를 들기가 쉽지 않았을 때다.



행정의 달인인 고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내가 출입기자들하고 차 한 잔 하면서 국정을 논할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국정홍보처에 일갈했다. 그는 기자실 통폐합 이전에 공무원들의 정보공개 수준을 높여야 하고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현행 기자실 제도보다 취재편의 수준이 낮아져선 곤란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정부중앙청사에 있던 4개 부처 기자실이 통합됐지만 총리실 기자실이 유지된 것은 고 총리 덕분이었다.

알권리를 강조한 高建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총리실 기자실의 혜택을 본 사람은 후임 이해찬 총리였다. 이 총리는 2004년 6월 기자실을 방문해 “기자들과 환담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이 있어서 좋다”고 했다. 총리실 기자실이 없었다면 일국의 총리가 통합 브리핑 룸에 가서 4개 부처 공무원과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담회를 열거나 총리실 회의실로 기자들을 불러 모으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실세 총리로 통하는 이 총리는 가장 먼저 총리실과 산하 기관의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이 총리 측근은 물갈이 기준에 대해 “민주정의당 당료 출신의 공무원이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아직도 고위 공직에 있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을 중심으로 1981년 1월 창당된 민정당 출신의 공무원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총리는 총리실과 산하 기관의 1급 이상 고위 공직자들을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불러 만찬을 함께하면서 사직서를 요구했다. 이들을 모두 자르겠다는 것은 아니고 이 총리가 사직서 수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사람마다 성격과 취향이 다른 것처럼 사직서를 내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이튿날 오전 출근하자마자 낸 사람도 있고, 동료 눈치를 보면서 미적거린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1급 이상 공무원 전원이 사직서를 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옷을 벗었다. 이 총리는 가장 먼저 사직서를 낸 공무원을 다른 부처 산하기관 상근부회장으로 보내는 아량을 베풀었다. 미적거린 이들은 1년이 넘도록 백수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이 총리는 인적 청산을 계기로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지’들을 모아 전열을 정비하고 수도 이전 문제,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 등 현안을 조율해 나갔다.

조직을 장악한 李海瓚

사의를 밝힌 정운찬 총리가 3일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개각을 앞두고 있는 만큼 마지막 국무회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 총리는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영포목우회 논란이 빚어지면서 조직 장악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고,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도 관철시키지 못했다. 아마 실세 총리였다면 조직 기강을 무너뜨린 영포목우회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대 총리 중에는 매일 대통령에게 문안 전화를 한 사람, 대통령 보고자료의 글자 크기까지 조정한 사람, 총리 명의의 명절 선물을 청와대 부속실 여직원에게도 돌린 사람, 정권 실세들에게 굽실거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최악의 총리였던 이들의 행태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집권 후반기를 남겨놓은 이명박 대통령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소신 있는 총리를 기용하면 어떨까.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