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우리江을 걷는다] ③금강 무주 벼룻길과 강변 옛길
입력 2010-08-04 17:32
잡초에 점령당한 조붓한 숲길, 트레커들의 발길을 사로잡네~
‘한반도의 가슴 서럽게 서럽게 쓸어내린 / 그 강물 기슭에 우리들 발을 묻고 / 집 지어 마을 이루고 살아가니 어찌 어머님 어머님이 아니시리요.’ 나태주의 시에 김애경이 곡을 붙인 가곡 ‘금강이시여’에서 금강은 어머니로 비유된다.
전북 장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진안 용담호에서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리고 무진장(茂鎭長)의 맏형인 무주에서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조붓한 강변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떠난다. 미루나무 가로수가 멋스런 강변길은 무주 사람들에게 장도 보고 마실도 가는 소통의 통로이자 삶의 실핏줄이었다.
무주의 옛길은 모두 금강변을 달린다. 하지만 강과 산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도로가 속속 건설되면서 금강 벼룻길 등 옛길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때로는 가파른 벼랑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때로는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강돌이 지천인 호젓한 강변을 꿈결처럼 걸어 다니던 옛길의 출발점은 부남면 소재지인 대소마을.
사방이 산과 강에 둘러싸인 대소 마을은 무주에서도 가장 오지였다. 1990년대에 도로가 확장되면서 오지마을이라는 불명예를 벗었지만 외롭기는 마찬가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마을 골목길을 벗어나자 칡덩굴에 점령당한 농로가 구릉을 넘는다. 대소리의 수풀은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청정지역.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른 금강 줄기가 바짝 다가서자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사과밭 옆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대신 농로와 연이은 깎아지른 벼랑에는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금강 벼룻길이 강변에서 홀로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벼룻길은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로 통하는 비탈길을 이르는 말로 이곳 주민들은 ‘보뚝길’로 부른다.
조항산 자락의 금강 벼룻길은 굴암리의 대뜰에 물을 대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절에 건설한 1.5㎞ 길이의 농수로.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소리와 율소 마을을 이어주는 지름길로 자리 잡았다. 어른들은 대소리 오일장이 서면 막걸리 한 잔에 불콰해진 얼굴로 벼룻길을 걸었고,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맨 아이들은 찔레 순으로 허기를 달래던 추억의 길이다.
거친 잔돌이 깔려있는 들머리를 통과하자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나무터널이 이어진다. 돌길은 흙길로 바뀌어 한결 걷기 편하다. 강변에는 나리꽃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벼룻길 중간쯤에 이르자 강으로 돌출된 거대한 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구박받던 며느리가 돌로 변했다고도 하고 선녀가 옷을 잃어버려 바위로 굳었다고도 하는 각시바위다. 각시바위 앞 각시소는 수심이 깊고 물의 흐름이 조용해 래프팅 보트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곳.
신기하게도 금강은 이곳에서 한반도 지도를 그린다. 유동마을에서 대치마을로 가는 작은 고개에서 보면 금강 벼룻길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빚어내는 국경선처럼 보인다. 봉길마을 백사장은 동해, 율소마을 앞 습지는 서해, 그리고 고개 아래의 비탈과 밭은 남해로 보인다.
금강 벼룻길은 이곳에서 각시바위를 뚫고 지나간다. 길이 10m로 어른 두 명이 서서 지나갈 정도로 넓은 동굴은 농민들이 일일이 정으로 쪼아 만든 땀의 결정체. 동굴을 통과한 금강 벼룻길은 복숭아밭을 지나 율소마을에서 다리쉼을 한다.
마을의 지세가 알밤처럼 생겨 밤소마을로도 불리는 율소마을은 실제로 밤나무가 많은 강마을. 이곳에서 대티교 삼거리와 굴암리를 거쳐 잠두2교까지는 강변을 따라 아스팔트 도로가 5㎞ 정도 이어진다. 일부는 옛길에 아스팔트를 깔았고 일부는 새로 낸 도로이다.
2001년 금강 상류인 진안에 용담댐이 완공되기 전까지 굴암리 강변은 자갈밭이었다. 그러나 댐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일정해지자 자갈밭은 습지로 변했다. 인간이 바꾼 환경에 자연이 적응한 셈이라고나 할까. 수심이 깊어진 금강은 래프팅과 천렵을 즐기는 피서객들로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두 번째 옛길인 용포리의 잠두마을 강변 옛길은 잠두2교에서 시작된다. 금강에 발을 담근 갈선산(480m)의 허리를 달리는 강변 옛길은 1970년대까지 무주와 금산을 잇던 비포장 국도였으나 잠두교가 놓이면서 잊혀진 옛길이 되었다. 잠두2교에서 잠두1교까지 강변 옛길은 약 2㎞. 차가 다닐 정도로 노폭이 넓고 평탄해 산책하기에 좋다. 벚꽃이 만발하는 이른 봄에는 강변 옛길의 벚나무 가로수가 거대한 연분홍 띠를 두른 듯 환상적이다. ‘잠두’라는 이름은 강변 옛길에서 내려다보는 지세가 마치 누에의 머리를 닮아 명명됐다. 무주 반딧불이축제 때 반딧불이 탐사지로 선정되는 잠두마을은 무주의 청정지역 중 으뜸으로 꼽힌다.
잠두마을 강변 옛길에서 아스팔트길로 내려와 새로 놓은 용포대교 교각 아래를 지나면 옛 용포교가 나온다. 용포교는 전북 무주와 충남 금산을 이어주던 길목 중의 하나.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된 웅포교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일부가 파손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금도 소통의 통로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세 번째 강변길은 용포교를 건너지 말고 시멘트 도로를 따라 하류 쪽으로 200m쯤 가면 나타난다. ‘예향천리 금강변 마실길’의 일부인 강변길은 내요대 마을에서 서면마을까지 3.6㎞.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강을 따라 조붓한 숲길이 이어진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잡초에 점령당했지만 길의 흔적은 뚜렷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놀란 물잠자리가 수십 마리씩 날아올라 어지럽게 춤을 춘다.
금강은 용담댐에서 용포교까지 강폭이 좁고 수심이 깊어 속으로 울음을 삼키듯 조용하게 흐른다. 그러나 용포교를 지나면 강폭이 넓어지면서 수심이 얕아진다. 여울을 흐르는 강물이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가 어머니의 통곡처럼 들린다.
다리가 없던 시절에 잠두마을 강변 옛길과 세 번째 강변길은 버스가 다니던 신작로였다. 무주와 금산을 오가는 버스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강변길을 달려 용포교 하류의 소이진나루터에서 우마차와 함께 나무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금강과 남대천이 합류하는 대차리에는 큰비라도 내리면 강물에 잠기는 세월교가 놓여 있다.
대전통영고속도로 굴암교와 용포교에서 차창을 통해 보이는 아름다운 강변길들. 그 길은 무주 사람들의 추억이 서린 잠두마을 강변 옛길이었다.
무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