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한국 정치서 자주 등장하는 비대위… 왜
입력 2010-08-03 22:19
선거 패배=비대위 체제?
정치권에 ‘비상대책위원회’가 또 등장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 등 지도부가 2일 밤 7·28 재·보궐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다. 당헌·당규상 김민석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박지원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고 중립 성향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비대위를 꾸렸다.
민주당의 이런 모습은 묘하게 한 달 전 한나라당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6·2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정몽준 대표와 정병국 사무총장 등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나흘 뒤 김무성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가 출범했다. 날짜와 방식에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선거 패배 후 지도부 사퇴, 비대위 출범의 수순은 똑같다.
이런 현상은 참여정부 때도 있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던 열린우리당이 광역단체장 12석 중 1곳만 건지며 대패하자 취임한 104일 만에 정동영 의장이 옷을 벗었다. 당시 비주류였던 김근태 최고위원의 의장직 승계 논란 끝에 김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는 비대위 체제가 출범했다. 열린우리당은 이전과 이후에도 선거 결과 때문에 수차례 의장이 바뀌었다.
다른 나라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대위 체제가 한국 정치에선 유독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우선 선거 패배 이후 국민들에게 ‘상황을 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나라당 당직자는 3일 “국민들한테 당이 이번 사태를 비상하게 바라보고 대처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지도부 사퇴 이후 당내 경선 관리 효과도 있다. 민주당 당직자는 “특정 세력에 힘이 쏠리지 않는 관리 기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내 모든 계파와 세력이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실리적인 이유와 별개로 정당정치 발전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숭실대 강원택 교수는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선 선거에서 지면 현 지도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으니 물러나거나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하지 비대위 체제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당장의 비판을 벗어나기 위해 전략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책임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꼬집었다.
문제는 현행 당 대표 체제가 유지되는 한 이런 현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선거 전에 지도부가 공천권이라는 무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결국 패배에 대해서도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암을 치료해야 하는데 빨간약 바르고 끝내는 꼴”이라며 “공천 제도나 당 지도체제 문제 등 근본적인 문제는 내버려둔 채 당장 그때만 모면하겠다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정치권에서는 말이 비대위이지 ‘과도집행부’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나온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