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DJ 자서전에 담긴 思婦曲

입력 2010-08-03 18:21

현대사를 풍미했던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삶과 애환, 정치역정이 담긴 ‘김대중 자서전’에는 DJ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정치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마음속에 깊이 새길 만한 내용이 있다.

먼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처음으로 공개한 부분. “오랫동안 정치를 하면서 내 출생과 어머니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감춘다 해서 어머니의 명예가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둘째부인이 낳은 아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유독 심한 우리 사회에서 서자임을 숨기고 싶었을 텐데 스스로 밝힌 것이다.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DJ는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에는 사실만 기록돼야 한다는 역사관을 가졌던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2004년 8월 DJ를 찾아가 사과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박 전 대표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박 전 대표의 사과 방문을 받고 DJ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박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 구원(舊怨)을 털어버리고 구원(救援)에 다가선 것이다. 박 전 대표가 호남을 끌어안으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DJ를 찾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DJ를 찾아가 아버지의 행위를 사과한 박 전 대표의 용기 있는 행동에 국민들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싶다.

아내 이희호 여사에 대해 기술한 부분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일인 1998년 2월 25일 “당신, 축하해요”라고 인사하는 이 여사에게 “당신도 축하합니다”라며 동지애를 표현했다. 퇴임 후 DJ가 아내 사랑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대목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도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당지도자,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정치 거목의 사부곡(思婦曲)이 애틋하다. 이 땅의 아내치고 남편으로부터 이 정도의 사랑 고백을 받은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