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한국 정부, ‘99엔 사건’式 대처 더 이상 안된다
입력 2010-08-03 17:56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4부 국치 100년, 이젠 해법 찾아야
③ 한국과 일본,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정부가 지난해 12월 ‘99엔 사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일본 정부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당시 액면가 그대로인 99엔을 지급해 국민적 분노를 촉발시킨 사건임에도 정부 당국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론 브리핑으로 국민 앞에 나타난 것은 사건 발생 약 한 달 만인 지난 1월 22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새롭게 이것을 외교적인 이슈로 문제를 (제기)해서 다시 협상하지는 않더라도,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한다는 의사는 전달을 한 바 있습니다.”
유 장관의 발언은 당장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규탄 시위를 불러왔다. 피해자 단체는 외교부가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여겼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사무국장은 “피해국인 대한민국 외교 수장이 가해국인 일본 정부를 향해 고작 한다는 소리가 ‘성의를 보여라’인가”라며 분노했다.
강제동원 보상 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는 사실상 일본 정부와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 차원의 해결책은 끝났으니, 개별 보상 문제는 알아서 하라는 취지다. 한국 정부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원인은 피해 보상의 ‘아킬레스건’인 한일 청구권 협정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수교 협상을 일단락 지으며 일본 정부와 청구권 협정을 맺었다. 협정은 ‘한국인 소지 일본 유가증권, 일본계 통화, 피징용자의 미수금,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 한국인의 대 일본 정부 청구 은급(은폐된 급여) 관계, 한국인의 대 일본인 또는 법인 청구’(합의의사록I)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2005년 정보공개 청구 소송을 통해 추가 공개된 옛 외무부 문서 ‘제6차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회의록 제1∼11차’ 등에도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의 채권 및 동산 등을 일본 정부로부터 대신 수령하는 것으로 합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징용자 피를 팔아 무상 3억 달러를 들여왔다’는 비판에 직면한 박정희 정부는 한시법인 ‘대일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1975년 7월에서 77년 6월까지 8만3519건의 피해 신고에 대해 91억8769만3000원을 현금 또는 보상증권으로 지급했다. 그러나 강제동원 사망자는 보상하면서도 부상자는 뺐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생략한 채 수백만명의 피해자 가운데 일부만 보상한 것도 문제였다.
수십 년간 누적된 피해자들의 공분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선택한 것은 ‘보상’이 아닌 ‘지원’이다. 2004년 11월 출범한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와 그 후신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설립된 배경이다.
하지만 국가가 임의로 나서서 개인의 사유재산 권리인 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는다. 미국 법정이나 유엔 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ILO) 전문가위원회 등은 부정적 입장이다. 지난 3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지급 임금에 관한 공탁금 문서가 한국 정부에 양도된 가운데 일본 내에서 관련 문서 공개 촉구 움직임은 계속됐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전범기업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우선 국민 개개인이 전범기업으로부터 받지 못한 돈이 얼마인지 명쾌하게 밝힐 책임이 있다. 이 사무국장은 “여든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수십 년을 싸워온 피해자들이 최소한 자기 구제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액수라도 정확히 알려 달라”고 말했다.
현재 정부 지원활동에서 나타난 비합리적 면모도 해소해야 한다. 국외 동원 대상자들과 똑같이 강제노역을 했지만 장소가 한반도 내 작업장이라는 이유로 정부는 국내동원 대상자 약 2만5000명에 대한 위로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 전범기업에서 받지 못한 미수금에 대해서는 1엔당 2000원으로 환산해 지급하고 있다. 유 장관 언급대로 일본 정부가 당시 소 2마리 값인 99엔을 액면가 그대로 지급한 것엔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 정부가 ‘99엔=19만8000원’이란 셈법을 유지하는 건 자가당착이라는 지적이다.
유골 봉환은 금전 보상과는 또 다른 문제다. 지금처럼 일본 내 사찰에 안치된 강제동원 민간 희생자들의 유골조차 봉환하지 못한다면 한국 정부는 자국민 보호라는 기본 책임마저 저버렸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청구권 협정에서 빠진 대상자들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김민철 집행위원장은 “반인도적 범죄인 위안부 건을 비롯해 사할린 억류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부터 풀자고 정부가 일본에 제안해야 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를 위해 한일 강제병합 조약 서명일인 22일은 일본 도쿄에서, 공포일인 29일은 서울에서 ‘한일공동시민선언’을 준비 중이다. 김 위원장은 “우리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일본 정부를 협상장에 끌고 나와야 하는데, 정부가 미동조차 하지 않아 답답하다”며 “최고위층의 정치적 결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특별기획팀=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