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日 정부, 기업 설득해 ‘독일식 기금’ 만드는 게 최선책

입력 2010-08-03 17:54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4부 국치 100년, 이젠 해법 찾아야

③ 한국과 일본,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6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식당. 한국과 일본의 변호사 20여명이 마주 앉았다. ‘대한변협·일본변호사연합회 공동 심포지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양측 표정은 밝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 심포지엄에서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로 했음에도 최종안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견은 일제시대 강제동원 문제를 푸는 데 있었다.

한국 측은 구체적 실천 방안을 선언에 포함하길 원했다. 특히 피해자 보상에 관해 대략적 방향이라도 넣자고 했다. 일본 측은 어려워했다. 내부에서 합의한 게 없다는 이유 등을 들었다. 그 부분은 이렇게 정리돼 21일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강제연행 문제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처리가 완료되지 않은 문제를 대한변협이 제기해 이에 대한 공동 조사연구를 조속히 실시하고 법적 문제, 해결책의 법적 검토, 나아가 제언 등을 하는 것이 검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조심스러운 입장 표명이었다. 문제를 거론한 주체도 일본이 아니라 한국 측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해결책을 논의하자는 차원에서 마련된 심포지엄이었다. 그동안 일본 현지 소송에서 한국인 피해자 편에 서서 헌신적으로 일해 온 일본 변호사들이었다. 하지만 포괄적 차원의 보상과 대책 마련에서 이들은 소극적이었다. 강제동원 보상 문제를 둘러싼 일본 내부 환경은 이처럼 차가운 것이 현실이다.

◇일본, “니시마츠건설 사례가 본보기”=국민일보 특별기획팀이 지난 6개월 동안 만난 일본 인사들은 대부분 일본의 강제동원이 잘못된 것이고 사죄와 함께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책임 주체를 따질 때는 해당 기업에 보상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1월 25일 일본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민주당 의원도 그랬다.

“일본 기업 중에서도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이 있습니다. 니시마츠건설(西松建設)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일본 기업이 각자 판단 아래 문제에 임해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곤도 의원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보상에 대처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정부가 거기까지 힘쓰는 것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본 법조계와 시민단체는 소송을 통한 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1차 후지코시(不二越) 소송이나 니시마츠건설의 중국인 피해자 보상이 본보기다.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 7명은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소송 과정에서 ‘화해’를 해 해결금 3500만엔을 받았다.

‘우키시마(浮島)호 폭침 사건’의 피해자 등을 변론해 온 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 변호사는 6월 21일 심포지엄에서 본보 취재진과 만나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 배상 준비가 안 됐다. 기업에 의한 배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광복 직후 조선인 노무자 7000여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향하다 폭발한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 사건은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본 군부에 의한 고의 폭침설이 제기됐다.

◇한국, “독일 모델 지향해야”=사실 기업이 보상에 응한다는 것 자체도 지금까지 일본 전범기업의 태도에 비춰보면 진일보한 일이다. 전범기업은 대부분 강제 징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법조계와 시민단체는 각 기업의 보상도 중요하지만 포괄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힘겨운 투쟁 끝에 특정 기업에게서 보상받고, 그 다음 기업과 싸우고 하는 식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피해자 전부를 위한 일도 아니라는 점에서다. 피해자가 고령인 점도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기금 조성에 대한 요구가 크다. 일본 정부·기업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 기업까지 참여해 기금을 마련하고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하자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피해자 보상 문제를 처리한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이 모델이다. 재원에는 일본 전범기업이 전후(戰後) 정부에 맡겨둔 공탁금이 포함돼야 한다는 게 국내 강제동원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이들은 공탁금이 당시 약 2억엔이었지만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 피해자 소송 전문가인 최봉태 변호사는 한일 변협 심포지엄에서 “일본 재판부 판결로서는 (문제 해결이) 힘들다는 사실이 다 확인됐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금을 당장 만들기 어렵다면 ‘사할린군사우편저금’으로 모델을 만들어 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됐던 조선인들이 임금 일부를 일본 정부의 강요로 불입한 게 사할린군사우편저금이다. 59만 계좌 1억8600만엔이 일본에 보관 중이다. 일본이 동일한 저금을 갖고 있던 대만 피해자에게 120배로 지불한 것을 고려하면 현재 가치는 22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내에서도 기금을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고쇼 다다시(古庄正) 고마자와대학 명예교수는 “강제병합 100년에 걸맞은 전후 처리는 몰수한 공탁금을 피공탁자(조선인)의 손에 반환하는 것”이라며 “이에 더해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시민까지 돈을 내서 미지급 임금을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결단해야=어떤 방향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일본 내 반성 분위기다. 이 문제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대책 마련이 구체화돼야 한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보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단체만 내고 있다. 상당수 국민이 강제동원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전향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부가 먼저 움직여 기업과 국민에게 왜 사죄해야 하고 보상이 필요한지 설득해야 한다. 이달 중순 이후 예상되는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강제병합 100주년 담화가 중요한 이유다.

일본 정부는 사죄 입장을 명확히 밝힌 뒤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한다. 먼저 공탁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순리다. 전후 65년 넘게 은행에서 잠자고 있는 조선인 미지급 임금을 피해자에게 돌려줄 것인지, 돌려준다면 어떤 방식이 될 것인지를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 곤도 의원은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앞으로 고민해 좋은 방법이 어떤 것인지 연구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보이는 성의의 정도가 향후 기금 조성이 가능한지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두 번째 과제는 일본 측의 한일협정 문서 공개다. 개인 청구권이 양국 정부 주장대로 소멸된 것인지 확인하려면 직접 문서를 봐야 한다. 일본 정부는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청구 소송에 못 이겨 2007년부터 약 6만쪽의 문서를 공개했다. 그렇지만 그중 25%는 검게 칠해져 있었다. ‘일한회담 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고타케 히로코(小竹弘子) 사무국장은 “도대체 한일협정에서 무엇이 결정됐고, 무엇이 결정되지 않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서 공개는 일본 측이 말하는 ‘소송을 통한 보상’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잣대가 된다.

일본 전범기업의 태도 변화도 중요하다. 먼저 각 기업이 갖고 있는 조선인 노무자 관련 자료가 있으면 공개해야 한다. 몇 명의 조선인을 얼마나 오랫동안 고용했는지, 누락된 공탁금이 있는지 등을 밝혀야 한다. 책임이 큰 전범기업끼리 모여 사죄와 보상 대책을 논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독일도 나치 정권에서 성장한 대기업 여러 곳이 소송과 불매운동으로 압박을 받자 먼저 머리를 맞대고 기금 창설을 구상해 결국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발족시켰다.



도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