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死’ 덫 벗어나려면 대기업 스스로 中企 보듬어야

입력 2010-08-02 21:25


대기업 횡포 현장 목소리… 상생협력 대안은

대기업 제지업체인 A사에 물티슈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공급해온 중소기업 S사는 최근 황당한 일을 당했다. A사가 제품 공급계약을 맺은 지 3개월 만에 다른 업체와 공급계약을 체결해버린 것. 이 때문에 S사는 25종의 물티슈 제품 중 3종을 제외한 나머지 제품의 판로를 찾지 못해 부대비용(대출·창고비) 등 1억3000여만원의 손해를 봤다. 하지만 A사 측은 “S사가 제조단가를 낮추려고 제품을 과도하게 생산한 과실이 크다”며 오히려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나서 대·중소기업 간 ‘상생경영’을 외치고 있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나 다름없다. 양자 간에는 철저한 갑과 을이 존재할 뿐이다.

대형 건설업체 K사는 지난해 울산 울주 언양 지역에 빌라단지 공사를 수주한 뒤 발주자로부터 공사대금 2760억원을 100% 현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중소업체 L사 등 18개 하도급업체에는 하도급 대금 392억여원 중 22%인 86억여원만 현금을 지급하고, 나머지 78%는 외상매출채권(어음)을 끊어줬다.

K사는 현행법상 하도급법 제13조 4항(현금비율 유지 의무 등)을 명백히 위반했다. L사 관계자는 그러나 “요즘처럼 주택경기가 안 좋을 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면서 “우리 같은 하청업체는 거의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공사를 맡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경기도 안성에서 휴대전화 부품 제조업체인 B사를 운영하다 최근 그만둔 최모(48) 사장은 대기업 S사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최 사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단가를 후려치는 건 기본이고, 꼭 금요일에 주문을 넣어서 납품 기일을 3일 뒤인 월요일에 맞추는 일이 허다했다”면서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직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2일 중소기업중앙회의 ‘최근 3년간 하도급 분쟁 접수 현황’에 따르면 접수 건수는 2006년 73건에서 2007년 85건, 지난해 말 154건으로 급증했다. 분쟁조정 사례는 하도급 계약서 미교부, 물품 구매강제,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요구, 부당한 경영간섭 등이 대부분이다.

중소 협력업체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사례에 대해 한 대기업 관계자는 “상생을 위한 노력은 많이 해 왔으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고 수백 개의 협력사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 “1차 협력사뿐 아니라 2, 3차 협력사까지 보듬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도록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심화·확대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중소기업 간 상생과 관련, 정부의 ‘채찍질’이 필요하지만 기업 간 자율성이 훼손될 경우 상생이 아니라 ‘상사(相死)’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산업연구원 고동수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직접 나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경영을 강조한다는 건 현재의 상황이 정부 개입 없이 해소되기 힘든 국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기업 스스로 대책을 강구하고 솔선수범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정부가 대기업을 강도 높게 압박할 경우 자칫 시장경제체제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정부 재정을 통해 기업 간 상생을 막는 비효율성을 줄이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그러나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은 자발적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강요에 따른다면 부담금 성격밖엔 안 된다며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박재찬 문수정 천지우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