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철 (7) 은퇴 앞두고도 개척… 200성도 꿈 이뤄

입력 2010-08-02 18:53


1974년 2월 12일 가족과 함께 교회 개척을 위해 낯선 땅 부산으로 이사했다. 40일 정도 지난 3월 20일 저녁, 두 할머니가 임시 목사관을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부산에 루터교를 알린 시작이었다. 이후 교회 대지에 임시 집회소 33㎡(10평)을 지었고, 6월 2일 주일에는 21명의 세례교인과 입교자가 생겨 작은 예배당은 북적였다.



성도들과 주민들의 요구로 어린이를 위한 교회학교를 개설했다. 이후 점차 성도들이 늘자 도저히 임시 예배처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부산의 개척 이야기가 미국의 자매교단 신문인 ‘루터란 위트니스’에 실렸다. 그 기사 덕분에 나는 미국 동역교회의 프리우스 총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선교 협의차 내한한 길에 부산까지 내려온 것이다. 프리우스 총회장은 “지금 당신에게 급선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임시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어렵습니다. 교회 건축이 시급합니다.”

그는 책임지고 건축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4만 달러를 보내줬다. 여기에 성도들의 건축헌금을 보태 약 2000만원을 들여 마침내 교회 본당과 사택 등 총 605㎡(183평)을 건축해 하나님께 봉헌했다. 75년 12월 21일 부산제일교회 봉헌예배를 은혜 가운데 드렸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 “못 가겠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 항변했다. 그러나 그때 내 속에 들어온 말씀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 55:8)였다. 분명한 건 하나님의 생각은 결국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후로 나는 어떠한 길 위에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주저했던 적은 있었다. 98년 팔복교회를 개척할 때도 그랬다.

당시 루터교단은 한국선교 40주년을 기념해 루터신학교(현 루터대) 안에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교회개척 겸 담임목사를 물색하던 중 나에게 의향을 물어왔다. 솔직히 40주년 기념교회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총회장직과 루터중앙교회 담임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그것도 60세를 훌쩍 넘겨 교회를 개척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축복의 통로를 경험한 터라 금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주님이 지금 나를 필요로 하고, 교단에서 나를 원한다면 마지막 노후를 불태워 보자.”

98년 5월 18일 많은 성도들의 축복 속에서 팔복교회를 개척했다. 그때 아내와 나는 두 가지 기도제목을 세우고 기도했다. “앞으로 7년 후 목회 은퇴 시에는 명예롭고 건강한 몸으로 떠나게 해주세요. 재적 성도는 200명이 되게 해주세요.”

전 교인과 함께 전도 총력전을 펼쳤다. 어깨띠를 두르고 교회 주변 마을에 전도지를 뿌렸다. 더운 여름, 아내와 아파트 단지에 전도지를 뿌리다 쫓겨난 적도 있었다. 주변 군부대와 경찰지구대, 노인병원, 국가보훈병원 등을 방문해 위로예배도 드렸다. 천재지변을 당한 이웃을 위해 늘 앞장서 달려갔다.

바쁘고 거침없이 사역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세상이 정한 은퇴의 나이가 되었다. 2005년 12월 첫째 주일에 은퇴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부의 기도제목처럼 명예롭고 건강한 몸으로 가족과 성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떠났다. 재적 성도는 200명에서 6명이 미달됐다. 그러나 물 붓듯이 부어주신 주님의 은혜가 족할 뿐이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