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동재] 힘센 이웃, 일본
입력 2010-08-02 17:38
“한국 기업들의 장점을 배우자.”
최근 들어 일본 언론에서 부쩍 늘어난 기사의 주제다. 열도의 유력 경제주간지인 닛케이(日經)비즈니스는 지난달 삼성전자의 경이로운 성장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이 주간지는 ‘삼성 최강의 비밀’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찬사에 가까운 얘기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일본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한 약육강식 형태의 한국식 경영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다른 경제 전문 잡지인 다이아몬드와 프레지던트도 같은 사안에 대한 분석 기사를 실었다. 한국 기업에 대해 ‘일본을 따라잡는 것은 어림도 없는 영원한 2등의 부류’ 정도로 인식했던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일본 기업의 한국 배우기는 극도의 매출 감소로 매장 철수를 선언하는 게 다반사가 된 백화점 업계에서도 벌어진다. 다카시마야(高島屋), 다이마루마쓰자카야(大丸松坂屋) 등 주요 백화점 임원들이 한국을 찾았다. 한국 주요 백화점의 경영 방식과 판촉 기법 등을 배우기 위해서다. 일본의 백화점 업계가 정식으로 조사단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분히 엄살을 떠는 측면이 강해 보인다. 그네들이 지구촌에서 차지하고 있는 경제적 위상은 여전히 막강하고도 당당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중국의 용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본이 세계 경제 2위 자리를 완전히 내준 것은 아니다. 지난달 7일 세계은행이 발표한 세계경제순위에서 일본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5조600억 달러였다. 근소한 차이나마 중국의 4조9000억 달러를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15위를 차지했지만 규모는 8325억 달러에 불과했다.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여전히 심각하다. 올 상반기에 기록한 181억 달러의 대일 적자는 반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다. 반도체와 LCD 산업 등이 호황을 맞으면서 오히려 일본산 자본재 수입이 급증했기 때문이라는 게 관세청의 분석이다. 실제로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재와 원자재·소비재 수입은 각각 42%와 37%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꽤나 긴 세월 동안 이 같은 구조는 바뀌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남의 좋은 점을 배우고 베껴서 내 것으로 만든다는 적극적인 태도는 일본의 독특한 정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필요하다면 한 수 아래로 여겨왔던 한국의 전자와 백화점 업계의 노하우라도 마다하지 않고 전수받겠다는 자세는 이 같은 토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굳이 일본이 아니더라도 한국에 대한 세계의 시선은 우호적이다. 곳곳에서 금융위기를 빠르고도 효율적으로 극복해 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사업 개발 기법을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이즈음 경계해야 할 1순위는 혹시라도 작은 성취감에 우쭐해 허장성세를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구촌의 국가와 기업들 사이에서 영원한 벗은 없다고 한다. 각각의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생리다. 한 순간의 방심은 곧바로 경쟁에서의 패배로 이어지고 이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온몸으로 경험한 바 있다.
새삼 1997년 11월 21일을 떠올린다. 외환 위기의 현실화를 알리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방침 발표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나 지하도에 둥지 아닌 둥지를 틀어야 했던 가장들. 다시 합칠 기약 없는 가족의 헤어짐. 항로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던 국가. 머지않아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에 현혹돼 희망가를 부르며 흥청망청했던 오만과 무지의 대가는 엄혹했다. 국민 모두가 고통을 떠안아야 했던 그때의 좌절과 분노는 당시를 겪었던 한국인의 DNA에 각인돼 있을 터이다.
인류의 역사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강자존(强者存)의 법칙을 줄기차게 읊조려 왔다. 그래서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 여전히 힘센 국가라는 사실은 문득문득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이동재국제부선임기자 dj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