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전 한푼 안들이고 200억 꿀꺽… 단물만 쏙 빼 먹고 상장 폐지
입력 2010-08-01 22:11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H사는 지난해 7~12월 세 차례 몽골 현지에 새로 생긴 구리광산 개발업체 지분을 51%까지 사들이겠다고 공시했다. 사용 금액은 본사 사옥을 판 돈 290억원.
그러나 이 돈은 이 회사 사주 이모(53)씨 뒷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투자하겠다던 몽골 현지법인은 이씨가 단돈 100만원에 사들여 사촌동생에게 명의 이전한 회사였다. 당시 공시를 보고 이 회사 주식을 산 투자자들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이씨는 지난해 3월에도 자회사 대여금 명목으로 회삿돈 200억원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는 H사 인수 전에도 여러 상장사를 옮겨다니며 주가를 조작해 처벌됐던 ‘기업사냥꾼’이었다.
사채를 빌려 상장사를 인수한 뒤 횡령하는 등 갖가지 비리를 저질러 회삿돈을 빼돌린 기업사냥꾼과 회사 임직원들이 대거 적발됐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지난 6월부터 상장 폐지됐거나 퇴출 위기에 처한 부실기업 중 범죄 혐의가 포착된 30여개 업체의 전·현직 임직원 80여명을 조사해 11개사 21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기소했다고 1일 밝혔다. 그 가운데 12명은 구속 기소됐으며, 아직 60여명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기소 대상자는 계속 나올 전망이다.
기소된 21명 중 11명은 이미 비슷한 혐의로 기소돼 전과가 있는 전문적인 기업사냥꾼으로 조사됐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사채를 쓰거나 개인적인 채권·채무 관계를 통해 코스피,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한 다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삿돈을 챙겼다.
거래처나 자회사와 가짜 계약을 맺고 선급금이나 대여금 명목으로 회삿돈을 지불하고 다시 되돌려 받는가 하면 비상장사의 주식을 시세보다 비싸게 주고 산 뒤 차액을 챙겼다.
사채업자와 짜고 가짜로 유상증자를 통해 증시 투자자의 돈을 끌어모은 뒤 빼돌리기도 했다. 사채로 빌린 돈은 유상증자 직후 전액(일명 ‘찍기’) 또는 일부(일명 ‘꺾기’)를 즉시 빼내 사채업자에게 갚았다. 증자 직후에는 대규모 거래계약 체결 등 호재성 공시를 올려 주가를 띄우고 자신들의 지분은 팔아치우기도 했다. 회사의 수표나 어음을 대주주의 개인채무 담보로 제공하는 일 등은 다반사로 벌어졌다.
전·현직 대표들이 이런 수법으로 돈을 빼돌리는 동안 해당 기업들은 흔들렸다. 일반 투자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식품업체 K사, 패션잡화업체 S사 등은 지난 4월 결국 상장 폐지됐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경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믿은 투자자들은 나중에 횡령 사건 등이 밝혀지면서 주가 폭락이나 상장 폐지 등으로 막대한 손해를 봤다. 검찰은 수사 대상 기업 중 상장 폐지된 업체에 투자한 소액투자자가 15만4000명, 투자손실액은 3700억원 이상이라고 추산했다.
검찰은 기업사냥꾼 등의 농간에 상장 폐지된 기업의 경우 최대주주나 대표이사가 유난히 자주 바뀌거나 주요 기업 활동 상황이 제때 공시되지 않고 번복되는 등의 공통점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수사에는 대검 중수부 지휘 아래 일선 13개 검찰청이 나섰으며, 금융감독 당국도 적극 협조했다. 이창재 대검 수사기획관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던 숨은 비리를 기획수사로 적발한 데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 금융감독 당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신속한 수사로 악덕 기업사냥꾼을 근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현 기자 k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