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중년 친구의 관심사

입력 2010-08-01 19:08


“선희가 보라는 영화는 다 재미없어.” 무슨 영화 볼까, 라는 질문에 답하고 나면 늘 이런 불평을 듣는다. 내가 권하는 영화는 재미없고 머리만 아프다는 것이다. 옛날엔 “그래 너희 수준이 그러니 어쩌겠니. 한심한 영화 보며 시간 낭비해라.” 그렇게 앙심을 품었지만, 요즘엔 “내가 어디 잘못된 거 아닐까? 왜 이리 생각이 다를까?” 걱정도 되고 반성도 하게 된다.

영화 보는 것도, 글 쓰는 것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사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동시대인이, 내 또래가 무슨 생각하며 사는지 모르는구나, 하는 불안이 엄습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친구가 전화하면 두 말 않고 달려 나가고, 단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려 한다.

그러나 친구들 만나봐야 자녀 교육, 시댁, 재테크 등 도무지 내 관심사완 거리가 먼 수다뿐이어서, “영화 한 편 더 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후회하며 귀가하기 일쑤다. 술도 못 먹고, 노래도 못하고, 담배 냄새는 더더욱 싫어하는 나로서는 동창회 참석은 고문에 다름 아니다.

개인의 취향,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함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자연 속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던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도, 19년 가꾸어온 버몬트 산골 터전을 정리하며 공동체를 위한 노력이 무위였음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훌륭한 분들도 몇 가구 되지 않는 이웃과의 교류에 실패했는데, 나 같은 외골수가 공동 관심사 가진 좋은 친구를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이지. 이렇게 위안도 하고 자포자기도 하며 혼자 음악회 가고, 전시회 가고, 여행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겨왔다.

헌데 최근 나와 맛있는 거 먹고 여행도 가고 싶다는 이들이 많아져, 차분하게 앉아 일하기 어려울 정도다. 내가 갑자기 인기인이 된 건 친구들이 살림에서 놓여나, 시간 여유 생기고 자신을 위한 투자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 덕분이다. 영화, 음악회, 전시회, 여행 정보 나누자며 연일 나를 불러내고 있다.

지난 주말엔 중학교 동창들이 북촌을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안내를 했다. 배꼽마당에 들어서자 마당에 고추 널던 어머니가 생각 나 눈물이 났다는 친구, 어릴 때 살던 한옥이 떠올라 가슴 뭉클했다는 친구 등, 모두 북촌의 예스러운 풍광에 감탄하며 즐거워했다. “선희 덕분에 정말 좋은 구경했다. 더운데 수고했어”라는 칭찬을 들으니 뿌듯했다.

그날 모임에선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강남 사는 친구는 가로수길, 서래마을의 명소, 예쁜 카페를 안내해 주자. 싸고 좋은 음악회 정보 알면 홈페이지에 올려라. 책 읽은 감상평에 댓글 달아라. 강연회도 함께 다니자, 등등. 중년 이후를 함께할 관심사를 확인한 행복한 자리였다. 아쉬운 건 여자 친구들은 문화 행사나 여행을 원하는데, 남자 동창들은 술 먹고 노래방 가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거다. 도서관과 미술관에서 더 많은 아저씨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