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26) 달리고 싶은 장단역 증기기관차
입력 2010-08-01 17:32
“철마는 달리고 싶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 전시 중인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등록문화재 제78호)는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이산의 아픔을 철마는 온몸으로 껴안고 있으니까요. 이 증기기관차는 일본 가와사키사가 제작한 것으로 무게 80t, 길이 15m, 폭 3.5m, 높이 4m 규모입니다.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연결된 경의선을 오가던 이 증기기관차는 1950년 12월 31일 서울행 운행을 끝으로 장단역에서 멈춰 서고 말았답니다. 이 증기기관차를 마지막으로 운행한 한준기씨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리고 있을 때 “평양으로 가서 연합군 군수물자를 싣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31일 황해도 한포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쪽 전황이 좋지 않으니 즉시 남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울로 되돌아오던 중이었죠. 그러다 밤 10시쯤 지금의 비무장지대(DMZ)에 있던 장단역에 도착하는 순간, 증기기관차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 다시 사용될 것을 우려한 미군측의 총격으로 기관차는 파괴되고 북한군이 화차 25량을 가져가면서 화통은 폭파시켜 선로를 벗어나게 됐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020개의 총탄 흔적을 간직한 채 온통 검붉게 녹슬고 부식돼 흉물처럼 방치되고 있던 철마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2003년 비무장지대 내 파주 장단역을 거쳐 북한과 철로가 연결되면서 햇볕을 보게 됐지요. 2004년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듬해 문화재청과 포스코 사이에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체결, 보존처리가 결정됐습니다.
유엔사 정전위원회 케빈 대령은 ‘1문화재 1지킴이’ 축사를 통해 “기관차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북한군이 장단역 기관차를 군사목적에 사용하려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전황이 얼마나 다급하게 돌아갔으면 최고 시속 80㎞로 달리던 멀쩡한 증기기관차를 아군 스스로 파괴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을까요.
2007년 12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포항산업과학원과 경주대 부설 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증기기관차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6월 25일 한국전쟁 59주년 기념일에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내 독개다리 주변에 전시공간을 마련해 증기기관차를 이전했답니다. 전시장에는 증기기관차 외에도 장단역 일대에서 발견된 철모와 총기, 수류탄 등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 57주년을 맞은 지난달 27일,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어떤 감회가 들었을까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상기시키는 전시품으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지만 여전히 달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문화재를 원래 있던 장단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장단역뿐만 아니라 신의주까지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푹푹’ 달릴 수 있는 날을 기대합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