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구절 한구절 그린 ‘팔순 작가의 삶’…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입력 2010-07-30 18:03
원로 작가는 언어에 앞서 세월로 글을 쓰는 것 같다. 소설가 박완서(79)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는 불모의 역사에 대한 심원하고도 먹먹한 기록이다. 여기에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이라든가, 등단 40주년이라는 사족을 붙일 게 없다. 오랜만에 귀한 글을 읽는다고 호들갑을 떨수록 값은 떨어진다.
작가 스스로 “청탁에 밀려 막 쓴 글이 아니고 그동안 공들여 쓴 것들이어서 흐뭇하고 애착이 간다”고 했듯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갈수록 미각은 살아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파노라마 같은 전경 속에 들어앉은 박완서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첫 장은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자택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호미로 잡초를 뽑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다.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중략)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17쪽)
내 소유의 마당을 가꾸다가 노안에 비친 건너편 숲의 몽실거림을 차경(借景)의 묘미, 즉 빌려 보는 경치로 즐기는 지혜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산문집을 관통하는 아련한 정서는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을 기다리는 형국’이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스무 살 시절이면 박완서 문학의 시원이기도 한 6·25전쟁 전후의 시기다. 1·4후퇴 당시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오빠를 손수레에 태우고 여섯 식구가 죽을 힘을 다해 무악재를 넘다가 바퀴가 빠져버린 탓에 오도가도 못하고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겨울을 났던 바로 그 즈음이다.
“나는 그 겨울부터 다음 해 겨울까지 일 년동안 생리가 멎었다가 서울이 수복되고도 한참 있다가 다시 시작됐는데 아마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트랜스지방 풍부한 턱찌기 덕이었을 것이다. (중략) 그때 생리만 멎은 게 아니라 성장도 멎어버린 것 같다.”(67쪽)
두 번 다시 오빠를 소생시키지 못했던 그 겨울의 기억 때문에 이렇게 쓸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 없는 자들의 편이다.”(68쪽)
산문을 읽다보면 본 것이 많을수록 잃은 것도 많다는 생각이 스친다. 김수환 추기경, 박경리 선생, 박수근 화백, 소설가 이청준 등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가 만난 사람 가운데 거개가 세상을 떴으니 여기에 실린 글의 절반쯤은 저 세상 사람들에게 바치는 글인 것이다. 어쩌면 이 산문집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또는 ‘기억을 땅에 돌려주기 위해서’라는 지독한 역설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기억 중 나쁜 기억은 마땅히 소멸해야 하고, 차마 잊기 아까운 좋은 기억이라 해도 썩어서 꽃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65쪽)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