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철 (5) 1967년 지원상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
입력 2010-07-29 19:19
결혼에 관심이 생긴 건 한신대에서 신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하며 한 여성과 정기적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부터다. 그 여성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본부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봄, 가을학기가 되면 대학 본부의 학생과에서는 총회로부터 장학금을 수령해 재학생들에게 전달하곤 했다. 나는 장학금 관계로 본부에 전화하는 일을 맡았다. 본부로 전화를 하면 이 여성은 청아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장학금과 관련해 설명해줬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던 것이다.
몇 살쯤 됐을까, 어느 분야에서 공부를 했을까, 어떤 사람일까…. 결국 총회본부를 자주 오가던 친구에게 그 여직원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한마디로 그녀를 표현했다. “콧대가 엄청 높단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그녀의 프로필을 읊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바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는데, 총회본부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대. 기장 전국청년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신앙심이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염치불구하고 편지를 썼다. 나는 김해철 전도사이고, 전화를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이 없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역시 묵묵부답.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란 속담을 되새기며 다시 세 번째 편지를 썼다. 기다리던 회신이 도착했다. “미안하지만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거절이었다. 자신은 김해철 전도사란 사람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신앙생활은 열심히 해도 목회자의 아내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어 네 번째 편지를 보냈다. 몇 달 기다렸을까. 만나자는 회신을 받았다. 그러나 이정옥이란 여성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때쯤 나는 한 신문에서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배우자감을 설문 조사해 기사화한 것을 보았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등 소위 ‘사’자 붙는 신랑감을 비롯해 외교관 교수 등을 일등 신랑감으로 꼽았다. 밑으로 죽 내려가보니 20등 정도에 ‘사’자 붙은 ‘목사’가 나왔다. 같은 그룹을 눈여겨봤다. 경찰과 지게꾼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설문 내용에 관해 언급하면서도 “한번 믿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진실은 통한 것일까. 결국 우리는 1967년 10월 서울 인사동의 기독교태화관(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작성된 곳)에서 루터회 1대 총회장이신 지원상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사실 아내가 조금씩 마음을 연 데는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다. 아내는 내가 ‘귀찮게’ 하자, 외삼촌인 이운집 목사님(당시 흑석동교회 담임)에게 상담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은 “사모의 길이 힘들거나 어렵다고만 여기지 말고, 상대방의 됨됨이를 보라”고 충고했고 한신대 관계자들을 통해 나에 대해 알아봤다고 한다. “김해철 전도사는 보증수표 같은 사람이야.” 아내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를 만난 것이다.
40여년을 함께 살면서 아내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수많은 사역들을 지원했다. 루터교 여선교연합회장직을 비롯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아시아교회여성연합회 중앙위원, 세계기도의 날 국제위원회 실행위원, 루터교세계연맹 동북아지역 여성조정관 등의 직함을 갖고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