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치유의 공간’ 색다른 두 곳… 병원, 카페를 닮다
입력 2010-07-29 18:37
·심리카페 ‘홀가분’
‘우울 57%, 자신을 돌봐주세요.’
컴퓨터 심리 테스트에서 ‘우울함’을 진단받은 나에게 빗방울 세 줄기가 그려진 하늘색 스티커 두 장이 주어졌다. 손바닥만한 사각형 스티커 한 장을 ‘오늘의 기분 기상도’라는 하얀 칠판에 붙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으니 남은 스티커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야 한단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 드러내기’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흘깃 스티커를 쳐다봤다. ‘나 우울해요’라는 하소연, 오랜만이다. 테이블에 ‘오렌지 블랙티’가 놓였다. 우울한 사람들을 위한 차(茶)란다.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심리카페 ‘홀가분’과의 첫 만남은 이랬다.
홀가분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47·여)씨 작품이다. 2004년부터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상담하는 기업 ‘마인드 프리즘’을 운영하다 좀 더 대중적인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보급하려고 지난주 이 카페를 차렸다. ‘자신감’ 또는 ‘활기’가 아니라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인 사회에서 이 공간은 여과 없이 감정을 표현하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없거나 우울한 감정, 들켜버리면 ‘루저(패배자)’로 낙인찍힐 것 같은 시시한 감정들까지도 말이다.
“임신 3개월, 배가 볼록하지 않은 임신부는 지하철을 타도 누구도 자리 양보 안 하잖아요. 그 사람의 상태를 알아야 배려도 이뤄지죠. 카페에서 스티커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상대방에게 ‘나를 배려해 줘’라고 말하라는 의미이자,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인식하라는 뜻입니다.”(정혜신)
홀가분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병원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자기 심리 상태를 점검하고 타인과의 관계 회복을 도모하는 정신적 ‘치료’ 공간이다.
“마인드 프리즘은 주로 기업 임원들을 상담했어요. 좋은 심리상담 프로그램이지만 고가인 데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일반인이 이용하기엔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죠. 좀 더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심리 치유 프로그램을 보급하자는 생각에서 카페를 구상한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명수(50)씨는 정씨와 함께 이 카페의 주인이자, 마인드 프리즘의 공동대표다. 정씨의 남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정신과 병원에서 하는 ‘상담치유’를 기업 형태로, 다시 카페라는 일상의 공간으로 끌고 나왔다.
마인드 프리즘이 지난 5년간 상담한 기업 임원들의 객관적 스트레스와 주관적 스트레스 지수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고 했다. ‘이 정도 스트레스는 누구나 받고 사는 것 아냐? 흔들리지 말고 목표만 봐야지’ 이런 인내심 때문에 자신이 실제로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받는지 잘 모르더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강한 인내력은 사회생활에서 강점으로 작용하지만 정신건강 측면에선 문제가 돼요. 그런데 마음의 상처를 계속 참으면 어느 순간 내면의 문제가 폭발해 버리기도 합니다.”(정혜신)
정신적 강인함을 성공의 밑거름이라 믿으며 마음의 상처를 끊임없이 이겨내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 홀가분은 그들에게 잠시나마 자신을 돌보자고 손 내미는 그런 공간이다.
홀가분은 1층 갤러리와 지하 카페로 구분된다. 정씨는 갤러리가 ‘심리적 샤워’를 하는 곳이라고 했다. 지난 24일부터 한 달간 열리는 ‘치유 그림 에세이전’은 아트디렉터 전용성씨 그림과 정씨의 에세이가 어우러진 전시회다. 빗방울이 땅바닥과 맞닿아 형성된 파동, 하늘에 걸려 있는 파란 구름 한 조각 등 절제된 그림들.
에세이에 담긴 삶의 지혜는 쉽다. 하지만 안다는 것과, 작은 지혜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다르다. 벽에 걸린 20편의 에세이는 카페를 방문하는 이들의 지친 어깨를 토닥인다.
“8월 말부터는 홀가분한 표정과 밥상에 관한 전시회가 열릴 거예요. 엄마가 해주신 짜파게티 한 그릇, 가족들이 먹는 밥상에 놓인 숟가락에서도 사람들은 위로를 느끼잖아요.” 이씨는 카페 손님들에게 밥상에 관한 사진을 출품토록 해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대인관계를 개선하는 게임이 마련돼 있다. 타인과 나눈 사소한 대화를 얼마나 기억하는지 테스트하는 게임, 내가 생각한 상대방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내가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는 놀이, 타인에게 심리치료 그림과 이메일을 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 ‘마인드 링’도 있다.
“언어 분석 연구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말은 약 430개래요. 그걸 불쾌함과 유쾌함으로 구분하면 7대 3 비율로 불쾌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답니다. 유쾌함을 나타내는 단어 중 사람들이 최고의 상태로 꼽은 게 ‘홀가분’이래요. ‘죽이네’ ‘황홀해’ 같은 말보다 ‘홀가분’이 더 유쾌한 상태인 거죠. 놀랍지 않나요?”(정혜신)
그러고 보면 삶은 홀가분한 상태와 언제나 역방향으로 흘러간다. 더 많이 쌓고, 채우기 위해 늘 서로 겨뤄야 한다. 어느 집 아기가 먼저 걷는가에서 시작하는 경쟁은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누가 더 많이 시험 정답을 맞히느냐가 된다. 다음은 누가 더 유명한 대학에 가는가, 누가 더 큰 회사에 입사하는가, 누가 더 넓은 집에 사는가.
“사람들은 자꾸 논리로 맞서려고 해요. 그러면 끝이 안 나죠. 오히려 마음을 나누는 대화가 갈등을 해결해줘요. 이곳에서 자신과 남을 보듬는 대화가 오가고, 행복 바이러스가 많이 퍼져서 사람들이 홀가분해지면 좋겠어요.”(정혜신)
·카페+병원 ‘제너럴 닥터’
서울 서교동 홍익대 정문 맞은편 놀이터 옆 4층 건물. ‘제너럴 닥터’는 3층과 4층에 자리 잡고 있다. 진료과목이 내과와 소아과인 이 동네의원의 주 메뉴는 드립 커피와 치즈 케이크, 에그 스크램블과 빵, 샐러드, 햄 등이 어우러진 ‘병원식 세트’와 ‘제닥 카레’. 카페와 병원이 하나로 합쳐졌다. 3층엔 주방과 테이블들이 있고, 4층에 올라가면 역시 테이블이 듬성듬성 놓인 공간 한쪽에 진료실이 있다. ‘진료시간’은 오후 2∼10시, ‘영업시간’은 오전 11시∼오후 11시.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김승범(33) 원장이 3년 전 문을 열었다. 정혜진(32·여) 원장은 단국대 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밟다 그만두고 합류했다. 환자와 의사가 소통하는 ‘인간적인 진료’가 목표라는 카페병원에서, 원래 동네의원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다는 김 원장을 지난 26일 만났다.
“마케팅의 극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서른 남짓한 젊은 의사가 병원에 카페까지 개업해서 하루에 환자도 몇 명 안 보니까 돈이 많냐고 묻는 분도 계셨어요.”
환자 한 명당 진료 시간이 보통 30분이다. 예약제로 운영돼 하루에 진료할 수 있는 환자는 15명을 넘지 못한다. 병원 수익만으로는 운영이 힘든 구조다. 개업 초기는 월세를 마련하기도 빠듯한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제가 개원할 때 연세대 정문부터 지하철 신촌역까지 내과나 소아과가 없었어요. 홍대 앞도 마찬가지였고요. 사람 북적이는 동네가 오히려 의료 소외지역이었던 거죠. 건강한 젊은이들은 병원에 잘 오지 않으니 수익이 날 리 없고 임대료도 비싸서 의사들이 쉽게 개원하지 못했어요.”
김 원장은 환자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끝나는 ‘5분 진료’를 하지 않으면서 홍대 근처에서 병원을 운영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생각한 게 카페였다. 카페가 수익원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드나들고 수다 떨 수 있는 인간적인 공간을 만드는 요소가 또 커피향이다.
“뒷골부터 아프다가 머리 한쪽이 지끈지끈 아픈 것과 원래 머리 한쪽만 아픈 것은 전혀 다른 증상이거든요. 그런데 환자들은 의사 앞에서 이런 걸 편하게 말하지 못하잖아요. 여기저기 아프다고 말해봤자 왠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약 대신 물만 잘 마셔도 나을 것 같은 감기 환자가 주사를 달라고 요구할 때. 증상이 심하지 않은 감기는 푹 쉬는 게 최선이라고 믿지만, 자기 생각을 환자에게 강요하기보다 환자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며 ‘자기 경계’란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제너럴 닥터에는 젊은 환자들이 주를 이룬다. 카페 한쪽에는 칸막이가 놓여 있고, 그곳이 곧 진료실이다. 카페와 병원이 분리되지 않고 연속선상에 있다. 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지 않고, 환자도 딱딱한 의자가 아닌 푹신한 소파에 앉는다. 환자가 증상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김 원장 또한 아팠던 경험을 꺼내놓으며 서로 소통하는 대화를 나눈다. 일방적인 질문 몇 개 던지기보다 증상을 가장 잘 아는 환자의 경험을 길고 충분하게 들어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제너럴 닥터는 환자에게 두 장의 처방전을 준다. 한 장은 약국용이고, 나머지 한 장은 의사가 환자들에게 자필로 쓴 소견서다. 가끔은 의사가 약의 모양과 효과를 그림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콧물이 멈추면 어떤 약은 안 먹어도 되는지,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을 할 때는 어떤 약은 먹지 않는 것이 좋은지, 자세하고 친절하다. 김 원장은 환자들에게 시시콜콜한 잔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위염 환자에게는 “세 끼 식사가 가장 좋은 약이다”, 감기 환자에게는 “뜨겁지 않게 미지근하게, 원샷이 아닌 조금씩 자주 홀짝거리며 물을 마시라”고 조언한다.
그래서인지 방문하는 환자의 30∼40%가 단골이다. 현재는 환자 예약률이 90% 이상인 데다 카페 운영도 잘돼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섰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또는 인생 상담을 하고 싶어서 진료실에 찾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현재는 예약제로 운영되다 보니 실제 아파서 오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저희 병원 진료가 ‘환자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 중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남을 낫게 했다는 만족감을 넘어서…그거 아시죠? 대화하면서 ‘상대방이 날 이해하고 있구나’ 느낄 때의 즐거움. 이런 상호 관계를 통해 의사도 계속 소모되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엉뚱한 시도가 세상을 즐겁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기존 의사를 공격하거나 의료제도를 바꾸자는 캠페인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적인 진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죠.”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