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치하에서도 황릉으로 조성된 까닭은… ‘대한제국 황제릉’
입력 2010-07-29 21:22
대한제국 황제릉/김이순/소와당
한국 역사상 황제는 두 명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고종(1852∼1919)과 순종(1874∼1926)이다.
그래서 황제릉도 두 기가 남아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릉(고종)과 유릉(순종)이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은 서거했을 당시 이미 황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왜 존재하지도 않는 황제의 능을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했을까.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이자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인 저자는 10여년 전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순종 유릉의 석물을 보고는 몇 가지 의문을 가졌다. 1920년대에 어떻게 이토록 사실적이고도 양감이 풍부한 석물을 제작할 수 있었을까, 바로 옆에 조성돼 있는 고종 홍릉과 조성연대가 7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양식이 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앞서 조선왕릉 40기를 조사하는 연구위원으로 위촉된 저자는 수 차례의 현장 답사와 각종 문헌 발굴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릉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왕릉 구조와 전문 용어 등 난해한 내용이 많지만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황제릉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의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과 이듬해 아관파천 등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다. 그런 가운데 고종은 특명을 내려 중국에 화가를 보냈다. 명나라 황제의 능을 모사(模寫)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이전부터 대한제국 황제와 황제릉의 꿈을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황제릉 조성사업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황제라면 7개월장이고 왕이라도 5개월장으로 치러져야 했지만, 일제가 장례식에 개입하면서 3개월장으로 축소됐고, 하관식도 밤 10시에 거행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도 고종의 능이 황제릉으로 조성된 것은 3·1운동으로 민심이 무서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순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당하고 ‘이왕’으로 강등됐으며 1926년 4월 25일 숨진 후 고종 홍릉 옆에 묻혔다. 유릉의 석물 제작은 일본인 아이바 히코지로가 담당했는데, “조선의 예술품은 영 쇠멸하였고, 신생기가 도래하여 장래 역사에 좋은 사실을 남기기 위하여 그 시대의 예술 작품을 남겨두어 후세에 전하게 하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조선의 문화와 미술은 쇠퇴하여 본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일본의 문화가 앞서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조선 식민지화의 정당성을 드러내려했던 일제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유릉 석물은 조선왕릉 40기 가운데, 바로 옆의 홍릉 석물과 비교해서도 입체감과 아름다움이 월등히 뛰어나다고 인정받아왔다.
두 기의 황제릉은 숱한 세월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일제와 대한제국(혹은 고종), 두 세력의 각축전이 석물과 건축양식 면면에 남아 있다. 이 책은 그 역사의 길항(拮抗)을 꼼꼼하게 들여다본 연구서다. 일제의 침탈 앞에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던 국가 현실, 일제가 조선 국왕의 무덤까지도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려는 도구로 활용했던 상황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