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윤재석] 美·中 사이에서
입력 2010-07-28 17:51
“본말전도된 G2의 힘겨루기로부터 탈피해 남북이 대좌할 모멘텀 회복을”
실망의 징후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에서 이미 감지됐다. 지난달 4일 안보리에 회부된 천안함 사건 논의가 한 달 이상을 끌다가 이달 9일 모호한 문구의 의장성명으로 나왔을 때 말이다. 북한은 기고만장했고, 우리 정부는 애써 ‘만족감’을 나타냈다.‘공격(attack)’과 ‘규탄(condemn)’ 등 강경한 문구의 주체가 누군지 명시하지 않은 의장성명에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을 범인으로 특정하지 못하고 정부가 견지했던 ‘선 천안함, 후 6자회담’ 원칙도 탄력을 잃어 결국 안보리 외교는 실패였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지난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 성명 역시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군도(일명 난사군도)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벌이는 바람에 천안함 논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남중국해 문제는 미국의 이해와 직결된 사안”이라며 영유권과 통행자유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그러자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클린턴 장관의 발언은 사실상 중국에 대한 공격”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미·중 간 갈등 때문에 의장성명 채택이 하루 늦어졌다. 천안함 관련 문안은 공격주체는커녕, ‘규탄’이라는 문구마저 빠진 채 천안함 침몰에 ‘깊은 우려(deep concern)’를 표명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어제 끝난 한·미 연합훈련을 놓고도 중국의 공격은 거셌다. 중국은 미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의 서해 훈련계획을 연일 강력히 비난했다. 작년 서해 훈련 때엔 아무 반응이 없었던 데 비춰 의외였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지난 16일 협박성 사설을 내보냈다. 이 신문은 “미국이 중국을 어떤 행위를 해도 참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100년 전과 같이 생각한다면 이는 미국 군인들의 최대 무지다. 중국은 약소국이 아니며 미국의 군사적 도전에 맞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 압박했다. 결국 미국은 항모의 선수를 동해로 돌려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연합작전의 의미를 부여했고, 중국은 서해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로켓포 훈련으로 맞대응했다.
최근 중국이 보이고 있는 일련의 행태는 G2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보여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동시에 동북아에서의 헤게모니 확보에 집착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유연함을 넘어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긴 이번 훈련의 또 다른 목적은 유사시 중국 제압을 위한 워밍업이기도 했으니까.
예정대로라면 오늘 중국 해운사인 창리(創立)그룹이 북한 나진항에서 출항 기념식을 갖고 본격적인 해상운송을 시작한다. 최근엔 북한이 청진항까지 중국에 내줬다는 얘기도 들린다. 동북지역의 물자가 나진, 청진항을 이용한 해상 항로를 통해 직송된다는 것은 두 항구가 중국 해군력의 동해 진출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이 “10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고 목청을 높일 때, 열강의 침탈 야욕으로 노심초사했던 100년 전 대한제국 시절의 아픈 역사가 떠올랐다면 지나친 신경과민일까. 천안함 사건 논의를 비롯한 남북문제를 미국과 중국에만 맡기기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언제까지 소극적인 자세로 끌려다닐 건가.
북한의 행태를 생각하면 분노스럽고 얄밉지만 직접 담판과 압박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국방장관회담이나 장성급회담의 모멘텀을 이어가야 한다. 고성이 오가더라도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 자체가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북한이 끝내 거부할 경우, 대북 심리전 재개와 해상 봉쇄, 우리로서 가능한 경제제재 등 북한에게 실효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압박 작전도 구사해야 한다.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은 진행하면서 말이다.
윤재석카피리더 jesus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