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한나라당 달라진 게 뭔가

입력 2010-07-29 00:52


스무 살이나 됐을까. 한 여학생이 차량이 꽉 찬 종로 거리 한복판으로 나선다. 뭔가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목소리는 차량의 소음 탓에 들리지 않는다. 인도에서 서너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뛰어나간다.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청년들은 순식간에 여학생의 팔을 낚아챈다. 양쪽 팔을 제압당한 여학생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간다.

지켜보던 시민들, 상인들은 한참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가고, 제 할 일로 눈을 돌린다. 함께 나서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울먹거리던 학생들도 골목으로, 지하철역으로 사라진다. 차들은 다시 종로 거리를 쌩쌩 달린다.

20년 전, 거리 시위의 모습은 요즘과는 사뭇 달랐다. 군사정권은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터였다. 대학 주변은 1년 내내 최루탄 냄새가 배어 있었고, 거리 시위는 채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시청 앞에서부터 한국은행 본점 앞 교차로를 거쳐 서울역 앞까지 시위대가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수만 명의 시위대는 몇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고 구호를 외쳐댔다. 1990년 5월 9일, 당시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이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 대통령을 총재로 선출한 날이었다.

그해 1월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의 전당대회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시위였다. 88년 4월 총선에서 국민들이 만들어준 여소야대 국회를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통해 여대야소로 바꿔버린 정치권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기도 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한 학년 정원이 40명이었던 과에서 같은 학번 36명이 참가하기도 했고, 전체 재학생 4분의 1이 참가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90년 당시 거리로 나섰던 이들은 이제 40대 초중반이 됐다. 87년 6월 항쟁 당시 거리에 나섰던 젊은이들은 40대 중후반이 됐다. 모든 정당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40대의 표심 근저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기억이 화인처럼 남아 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창당된 한나라당은 신한국당 시절을 거쳤지만 근본적으로 민주자유당의 후신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나라당 당직자들에게 “한나라당의 뿌리는 결국 20년 전 민주자유당, 더 거슬러 올라가 민주정의당 아니냐”라고 얘기하면 “대체 언제 얘기를 하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당명뿐만 아니라 정강·정책도 달라졌고 구성원도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던 재야 출신 인사가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를 지냈고, 지금은 군사정권의 물고문을 밝혀냈던 검사 출신 의원이 당의 대표를 맡고 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인사들이 당내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고, 각계의 전문가 집단들이 당을 받치고 있다.

떠난 지 3년여 만에 한나라당을 다시 출입하게 됐다. 한나라당은 그 사이 제1야당에서 절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으로 바뀌었다. 한나라당에 돌아와 지켜본 지난 3주일 동안 전당대회와 재·보궐 선거가 있었다. 전당대회에 나선 후보들 간의 이전투구식 설전은 변한 게 없었다. 성희롱 파문도 그대로였다. 계파 다툼은 더 세분화됐다. 사찰 파문의 배경에 당과 여권 내부의 역학 문제가 얽혀있다는 정황도 들렸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데 몇몇 상황만 보면 20년 전보다 나아진 게 뭔지, 3년 전과 달라진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한나라당은 이번 재·보선 결과 의석수가 또 더 늘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엇이 나아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국민은 아직도 많다.

정승훈 정치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