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철 (4) 뒤늦게 고교 졸업… 한국신학대학 입학

입력 2010-07-28 18:52


1950년대 후반만 해도 대부분 교단에서 4년제 신학교만 나오면 준목 고시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뒤늦게 고교를 졸업한 나는 우리나라 신학교 중 처음으로 신학대학 인가를 받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에 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다. 어렵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으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겠는가.

신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장남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며 당장 주일부터 바로 교회에 나가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회 나가면 먹을 걸 주냐? 서양무당 되어서 뭐할 거냐?”며 여전히 펄쩍 뛰셨다. 의절하자고까지 했다. 그럴수록 나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난 목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마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학교 내에서 학생회 활동과 교단(한국기독교장로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수님, 교회 어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는 한신대 설립 이래 처음으로 실천신학상(설립자 상)을 받았다.

졸업과 함께 서울 신당동에 위치한 새밭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1년 후에는 모교인 한신대 문동환 교수님의 권유로 신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맡게 됐다.

지금 나는 기독교한국루터회 소속 목회자다. 장로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어떻게 루터교 목사가 됐을까?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현실적인 두 가지 소망 때문에 그랬다. 첫째, 신학교에서 중세기 교회사를 공부하며 ‘어떻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또 오도된 구원관에 대해 항거하고 용기 있게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둘째,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대학원에 진학해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꿈을 키웠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도사로, 학교에서 학생 생활지도 일을 겸하다 보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루터회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지원용 박사님이 루터신학원을 세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원상 목사님도 그곳에서 공부할 것을 권면하셨고, 나는 “심사숙고해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만, 당시 루터교단은 소속 교회라야 임마누엘교회(현 도봉교회)와 성요한교회(현 왕십리교회)가 전부였다. 신학교는 무인가인데도 대학 졸업 후 4년이나 더 공부를 해야만 하는 험난한 과정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주변의 교수님과 선배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왜 큰 교단을 두고 그렇게 작은 곳에 가서 고생을 자초하려 드느냐”고 만류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루터교신학원 제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이때부터 매주 4개 대학을 전전했다. 루터교신학원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적을 두고 감신대와 연세대 문리과대학에도 나가 수업을 들으며 마음껏 공부했다.

이렇게 4년간 모든 수업을 마치고, 1년간의 실습을 한 후 마침내 1971년 1월 10일,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더 이상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내 아들이 목사가 됐어”라고 오히려 동네에 자랑하시며 교회로 기쁘게 걸음을 옮기셨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