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철 (3) 교회 출석 6개월… “목사 되겠다” 결심
입력 2010-07-27 17:36
신대리교회 지원상 전도사님은 독일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료선교를 통해 아프리카를 변화시킨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에 관해 설교했다. 그 말씀은 19세 청년의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쪼개었다(히 4:12).
“나는 어떻게 이 땅을 변화시킬까?”
전도사님의 설교를 듣는 내내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먼저 여섯 동생을 교회로 인도했다. 또 마을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향했다. 6·25 전쟁 이후라 동네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다. 부스럼도 많고,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리는 길고 뒤엉켰다.
금융조합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소독용 약품과 솜, 머리카락을 깎는 기계도 구입했다. 아픈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고름을 짜고 약을 발라줬다. 머리를 감기고 깔끔하게 이발도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드디어 네 놈이 연애당(교회)에 나가더니 완전히 돌았구나. 어렵게 일해 번 돈으로 이상한 짓이나 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회사에서도 연애당을 나간다고 손가락질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뒷산으로 뛰어올라가 힘껏 소리치고 찬양을 했다.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마 그 시절, 산에서 소리치며 발성 연습을 잘한 덕에 지금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 같다.
교회를 다니고 6개월쯤 됐을 때,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전쟁 후 잿더미 위에서 무지와 가난 가운데 죽지 못해 근근이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고 우리 가족을 구원하는 길은 내가 목사가 되는 길밖에 없다. 곤지암이라는 내 마을에 복음을 전하려면 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서울로 올라와 신학교를 알아봤다. 입학 자격이 고교 졸업을 해야만 주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내 학력은 덕수상업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전쟁으로 중단했으니, 고등학교는 고사하고 중학과정도 4개월 공부한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20세에 다시 중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 학교, 저 학교를 기웃거리며 고교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봤다.
우연히 신설 고교인 배명고에서 1학년을 추가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졸 이상이어야 했지만 당시 조용구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저는 목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 사명을 갖고 이 학교에 왔습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입학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애원했다. “그럼 가입학이라도 받아주십시오. 한 학기 열심히 한 거 보시고 그 후에 입학 여부를 결정해주세요. 그때도 안 된다면 내쳐주십시오.”
1학년 2학기 배명고에 가입학했다. 스무 살이었다. 수학 기학 물리 외에 모든 과목을 줄줄 외웠다. 오가는 전차 안에서는 성경을 읽었다. 교장 선생님은 결국 “김군, 그동안 고생 많았네. 입학을 허락하네”라며 나의 등을 두드려주셨다.
내가 열 살도 채 안됐을 때, 이웃 마을의 유명한 보살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을 지나던 중 그 보살은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20세 벽을 넘기 힘들겠어.”
어머니는 그 이후로 나를 위해 열심히 치성을 드렸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에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었고, 신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주님의 크신 은혜인가.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