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07-27 17:33
(4) 마음을 고요하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머니 품에 있음 같이 하였나니”(시 131:2)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전부를 소유하기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소유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일을 하실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고요하게 되는 것이 영성 생활의 목적은 아니지만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영적 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지루함을 잘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가하기 때문에 고요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바쁘기 때문에 고요하지 못하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출 32:1). 오늘날 우리는 일 중심의 세상에 살면서 조금만 놀거나 쉬어도 못 견디고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인생의 속도를 늦추면 다른 사람에게 뒤질까봐 늘 조바심하고 산다. “당신이 가는 목표가 분명할지라도 천천히 가면 뒤차에 치일 수 있다”고 한 마크 트웨인의 말이 이 분위기를 대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가는 것이다. 빨리 간다고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고통에 맞서는 용기다. 고통은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맞서야 한다. 우리에게는 외적인 성취와 목표를 달성하도록 자신을 내모는 은밀한 본성이 있다. 그것을 이루는 시한도 우리가 정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지만 또한 바쁨과 성취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본성도 있다.
영성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런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리고 바쁘게 살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정도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를 쓴 존 클리마쿠스는 많은 말은 대부분 영적인 성숙에 반대된다고 보았다. “많은 말은 우쭐대며 자랑하고 싶어 하는 허영의 보좌이다. 많은 말은 무지의 표시이며, 비방의 통로이며, 희롱의 지도자이며, 거짓말의 종이며, 후회의 무덤이며, 회상의 부재이며, 신중함의 끝이며, 열심의 냉각이며, 기도의 흐려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 같은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말을 줄여야 한다.
우리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성은 어린아이의 특징이며 하나님 앞에 선 겸손의 표징이다. 단순함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를 만나 자신의 영적 생활의 고민을 길게 털어놓았다. 복잡한 이야기를 들은 테레사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하루 한 시간 주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잘못인 줄 아는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단순함은 고요함의 시작이다. 어린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같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 그 단순함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