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전범 30년만에 첫 단죄… 전범재판소, 고문 악명 떨친 카잉에 징역 35년 선고

입력 2010-07-26 21:22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에게 마침내 법의 심판이 내려졌다. 30년 만이다.

캄보디아 전범재판소는 26일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1975∼79년) 민간인 학살에 앞장선 카잉 구엑 에아브(67)에게 반인류 전쟁범죄 혐의를 인정해 징역 35년형을 선고했다. 카잉은 1999년 체포돼 5년의 감형을 받아 남은 형기는 19년. 사실상 종신형 판결이다.

킬링필드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카잉 외의 나머지 크메르루주 중앙위원회 멤버 4명의 재판은 내년부터 시작된다. 크메르루주 수장 폴 포트는 98년 사망했다.

카잉이 가장 먼저 재판을 받게 된 건 그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죄를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생 때인 22세에 크메르루주 지하조직에 가입한 뒤 고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는 ‘도익’이라는 암호명으로 공작과 고문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은 뒤엔 수도 프놈펜에 S-21이라는 교도소를 세우고 ‘반동분자’를 끌고 와 고문하는 일을 맡았다. 도익은 크메르루주 중앙위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가장 잔혹한 인물로 악명을 떨쳤다. S-21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사례만 1만2272명에 이른다. S-21과 도익은 크메르루주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79년에 무너진 뒤 카잉은 시골로 숨었다. 그는 이웃에 살던 농부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면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기독교인이 됐다. 카잉은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에 앞장선 열렬한 기독교 신자로 변화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99년 한 신문의 보도로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는 기자 앞에서 도익이 자신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주변의 도피 권고를 물리치고 자신의 죗값을 피하지 않았다.

체포된 카잉은 난관에 부닥쳤던 킬링필드 재판에 돌파구가 됐다. 옛 동지들이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폴 포트 탓으로 돌릴 때 카잉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관련 서류를 찾아내 동료의 필적을 감정하는 일에 협조했다. 이날 성경책을 들고 재판정에 선 카잉은 “S-21에서 벌어진 고문과 살인은 모두 나의 책임”이라며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모았다.

시민단체 캄보디아법정감시의 타일러 님스는 이날 판결에 대해 “킬링필드의 생존자를 포함한 모두의 명예 회복을 가져왔다”며 “캄보디아와 국제 형법 역사의 중요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러나 캄보디아의 부실한 사법제도와 정치권력의 개입 때문에 나머지 전범에 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전했다.

◆Key Word 킬링필드(Killing Field)

‘죽음의 땅’을 의미한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이 3년7개월 동안 전체 인구 700만명 중 3분의 1에 가까운 200만명을 학살한 참혹한 사건을 상징한다.

미군이 1975년 인접한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캄보디아 무장단체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세력이 약화된 친미 론놀 정권을 몰아냈다. 과거 정권에 협조한 기업인, 지식인, 유학생, 부유층 등을 무차별 학살했다. 또 ‘농민 천국’ 건설을 내세우며 도시인을 강제 이주시키고, 비협조적인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도 반동분자로 몰아 처단했다.

캄보디아 주재 뉴욕타임스(NYT)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가 ‘디스프란의 생과 사(한 캄보디안의 이야기)’라는 글을 80년 1월 NYT에 실었고, 85년 롤랑 조페 감독이 이를 토대로 영화 ‘킬링필드’를 만들어 크메르루주 정권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