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철 (2) 중학교 입학 4달 만에 6·25 터져

입력 2010-07-26 17:59


교회에 나가기 전까지 내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 ‘팔자소관’이었다. 장수해도 내 팔자, 단명해도 내 팔자, 행복하거나 불행해도 모든 게 팔자려니 생각했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이라는 시골 마을, 그것도 지독하게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것도 팔자였다.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들어갈 형편이 안됐다. 당시 중·고등학교 형들이 흰 테 두른 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마냥 부러웠다. ‘나도 흰 테 두른 모자 좀 써보자’며 가족 몰래 서울로 올라가 중학교 시험을 쳤다.

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덕수상업중학교에 합격했다. 부모님은 공부를 하겠다는 아들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쌀과 소, 돼지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입학하고 보니 모자에 흰 테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둘러져 있었다. 온갖 잘난 척하며 그렇게 서울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입학 넉달 만에 6·25가 터진 것이다.

“아! 이것이 내 운명이로구나.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났어. 가난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게 내 팔자야.”

그토록 공부를 하려고 애쓴 이유가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공부만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꿈도, 희망도 모든 걸 접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조차 계획 속에 포함하고 계셨다.

서울에서 상업중학교에 몇 달 다닌 덕에 금융조합에 쉽게 취직했다. 급사 겸 금전 출납을 담당했다. 고객 중에 곤지암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김갑순 선생이 있었다. 학교의 입출금 업무를 담당해 나와 자주 만났다. 그런데 이 선생은 나만 보면 계속 교회에 가자고 졸랐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교회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 우리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또 예수님에 대해 전한 사람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몇 차례 건성으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김 선생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나의 고객이고, 내 동생의 담임이었으며, 내 초등학교 2년 선배였다. 어쩔 수 없이 김 선생을 따라 교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신대리교회에 처음 간 날, 1954년 6월 5일 주일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30평 정도의 마루바닥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전쟁 통에 불탄 성경을 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잠자리채 같은 게 사람들의 손끝을 지나갔다. 그땐 몰랐지만 헌금주머니였다. 김 선생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살며시 내 손에 쥐어줬다.

‘한번쯤 나갔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이후에도 주일이면 꼭 나를 데리고 교회에 나갔다. 그렇게 김 선생을 따라 3개월을 다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말씀처럼 내 마음이 움직였다. 주일이 기다려졌다. 불타고 남은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밤 새워 읽었다.

9월의 어느 주일 낮 예배. 설교자는 지원상 전도사님이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제1대 총회장을 역임한 루터교단의 산 증인. 그분을 산대리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