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 (月)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입력 2010-07-25 17:27
찬송:‘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304장(통 404)
신앙고백:사도신경
본문:“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장 7~8절)
말씀:중언부언이라는 단어는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다’ 혹은 의미가 있더라도 ‘마음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타종교의 주문 외듯 하는 반복하는 기도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의미 없는 말을 반복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르면서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의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선동을 받은 사람들이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위대하도다, 에베소인들의 아데미여”하고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반복된 말을 쌓아올려서 그들의 신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반복된 기도를 드리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엘리야도 비가 오기를 7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없는 어구를 기계적으로 주문처럼 반복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오직 크고 두려운 분, 율법을 조금만 어겨도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 감히 얼굴을 들고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위엄스런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 대한 생각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달려가면 안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고, 얼마나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바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기도문을 통하여 제일 먼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바로 알면 바른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되며, 수시로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간구할 수 있으며, 시련을 만나도 그분의 섭리를 의뢰하고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이 진리를 늘 마음에 담아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기도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사실 늘 잊어버린 바 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가 안길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자녀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백동조 목사<목포사랑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