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25) 옛 선비들의 피서법
입력 2010-07-25 17:38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입니다. 모두들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나시겠지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시절에는 어떤 방법으로 더위를 쫓았을까요.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824년 여름 ‘다산 시문집’을 통해 8가지 피서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깨끗한 대(竹) 자리에서 바둑두기입니다. 세상 시름 다 잊고 유유자적하다 보면 더위도 함께 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둘째, 소나무 단(壇)에서 활쏘기랍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어떤 대상에 열정을 쏟으면 더위쯤이야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죠. 셋째, 빈 누각에서 호젓하게 투호놀이를 즐기는 것도 청량(淸?)의 한 방법입니다. 넷째,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뛰기로 춘향이 치마폭 날리며 시원한 바람을 가른 것은 아무래도 여성들의 피서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섯 번째는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동쪽 숲 속에서 매미소리 듣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자연과 더불어 더위를 이기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지요. 일곱 번째는 비오는 날 시 짓기랍니다. 비가 오면 더위야 한 풀 꺾이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시까지 읊조린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더위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덟 번째는 달 밝은 밤 발 씻기입니다.
다산의 마지막 추천법인 ‘탁영탁족(濯纓濯足)’은 갓끈과 발을 물에 담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는 인격 수양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답니다. 조선 숙종 때 선비 윤증은 독서로 더위를 이긴다고 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아예 책을 싸들고 산으로 놀러가기도 했다지요. 깊은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독서를 하는 풍경, 이보다 더 낭만적인 피서법이 있을까요.
이밖에도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가지가지입니다. 조선 말 선비 이유원은 ‘임하필기’를 통해 “여름 평상에서 죽부인을 두고 수족을 쉰다”고 했습니다. 죽부인은 원통형 대나무 침구로 여름철 안고 자면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하지요. 연일 내리쬐는 폭염에는 체통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바짓가랑이를 내리고 바람 목욕을 시키는 ‘풍즐거풍(風櫛擧風)’도 있답니다.
일상생활에 바빠 휴가를 떠나지 못하신다면 도심 속 고궁에서의 피서는 어떻습니까. 서울시내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금천(禁川)에 물이 흐르는 창경궁에서 8월 31일까지 여름나기 행사가 열린답니다. 궁궐 초입부 마당 어구에 흐르는 시냇물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명당수의 의미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 주는 경계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천이라 불렸습니다.
조선의 모든 궁궐에는 이러한 금천이 흘렀고 이를 건너기 위해 금천교(옥천교)가 세워져 있으며, 신하들은 이 금천교를 건넘으로써 사사로운 마음을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정치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궁궐 어구를 흐르는 맑은 물, 울창한 나무가 드리워진 그늘 아래에서 연꽃도 구경하고 세태에 찌든 마음도 씻어내는 일석이조의 피서법이 아니겠습니까.
이광형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