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모라비안선교모델 구축 시급하다
입력 2010-07-25 11:38
[미션라이프]이 글은 2010년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할렐루야 교회에서 열렸던 제5차 한국선교전략회의(NCOWE V)와 7월 7일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열렸던 2010 부산선교대회에서 발표된 주제 강의 중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한국대표 이현정 목사가 발표한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 강의 전문이다. 이를 다섯 차례에 걸쳐 게재 한다. 이번 한국선교전략회의 주제는 “125년 한국교회와 선교, 그 벤치마킹 모델 만들기”였다. NCOWE V 준비위원회는 UBF 선교의 모델을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로 칭하고, 이에 대한 주제 발표를 이현정 목사에게 부탁하였다.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1)
이현정 목사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한국대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총무, 선교학 박사)
들어가는 말
내가 부탁(명) 받은 주제는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이다. 주최 측은 UBF 선교를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UBF의 선교를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약간은 조심스럽다.
내가 38년간 전임 사역자 중 한 사람으로 섬기고 있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는 어떤 선교의 모델을 본받아서, 혹은 어떤 선교신학적 이론에 근거해서 선교를 시작하거나 계속해온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 복음운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선교가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도 없다.
UBF 선교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우리는 모라비안 선교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우리의 선교형태가 그들을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라비안 선교의 대표적인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뜨거운 선교의 열정이며, 둘째는 평신도들을 선교에 동원하여 자비량 선교를 했던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이다. 모라비안 선교의 모델은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 바울의 선교 모델을 닮은 것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선교 모델이나 모라비안 선교의 모델을 스승과 같이 생각하고 공부한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오늘날 급변하는 선교의 상황에서 모라비안 선교는 21세기 선교의 좋은 대안적 모델을 보여주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고 본다. 나는 모라비안 선교와 UBF 선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봄으로서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I. 모라비안 선교와 UBF 선교의 공통점
1. 뜨거운 선교의 열정
18세기 유럽의 모든 교회가 자체 내의 문제에 얽매어 있을 때, 모라비안 선교회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실천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회였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전신인 형제회는, 1457년에 보헤미야의 쿤발트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했다. 말씀에 단순히 순종했다.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구제에 힘썼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본받고 닮고자 했다. 이들은 중세 암흑기 말에 많은 박해를 받았다. 이를 피해 다니다가 1722년부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베르셀스도르에 들어와 자유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정착지를 “주님의 집”이란 뜻의 “헤른 훝”(Hern Hut)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이곳은 2세기에 걸쳐 세계선교 본부센터의 역할을 했다. UBF교재연구부, 위대한 선교사들 (UBF 출판부, 1990), 140-145.
이들은 숱한 박해를 이겨내면서 이미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을 갖게 되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함께 이기는 가운데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단순한 믿음과 순종의 영성이 형성되었다. 당시 타락한 교권주의에 염증을 느낀 그들은 평신도들을 선교에 동원하는 평신도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세계선교에 부르셨다.
모라비안 선교회에서 파송된 첫 선교사는 1732년 서인도 제도로 파송된 레오나르드 더버 라는 토기장이와 데이빗 니치만 이라는 목수였다. 당시 토마스 섬이나 크르와 섬 같은 서인도 제도는 네덜란드령으로, 사탕수수나 코코아 농장을 위해 매년 10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왔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이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대농장의 주인들은 흑인들이 크리스천이 되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되고 또 반역을 일으킬까봐, 선교사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역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희생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리하여 17년 만에 2,000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고, 1879년에는 41개 지부, 78명의 선교사와 36,698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Ibid., 147-148.
1754년에는 재단사 대네, 귀트너가 남아메리카 수리남에 파송되었다. 이후 사업, 제빵업, 시계 제조업을 하는 동역자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회사를 세우고 현지 주민들을 고용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크리스티 윌슨, 현대의 자비량 선교사들,(김만풍 역, 순 출판사, 1993) 42
선교사들의 실제적인 도움과 헌신을 통해서 855명의 인디언과 59명의 니그로, 그리고 731명의 노예들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UBF교재연구부, Ibid., 149.
그린랜드에는 묘지 관리인인 크리스천 데이빗을 지도자로 세 명의 선교사가 개척자로 나갔다. 그들이 그린랜드 행 배를 타기 위해 코펜하겐에 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고 조롱했다. “무식한 평신도가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얼음 땅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에스키모인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굶어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키모인들과의 거래를 통해서 번 수입으로 생활을 했다. 그들이 얻은 첫 신자는 카이아나크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전도로 온 가족이 세례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북쪽 지방의 과격한 에스키모인들이 쳐들어와 그의 처남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그린랜드로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항해 중에 배가 좌초되어 죽거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881년까지 19명의 순교자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1,545명의 에스키모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다. Ibid., 150.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는 1736년 조지 슈미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헤른 훝 본부로부터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7일 만에 네덜란드를 거쳐 아프리카 최남단 호텐토트 지방으로 갔다. 그의 믿음과 수고로 1742년 세례명이 윌렘인 사람이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크리스천이 되었다. 당시 아프리카 식민주의자들은 돈벌이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1754년부터는 보어인들이 주기적으로 아프리카 토착민들을 학살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했고, 1882년에는 동부와 서부 두 지역에만 25개의 학교와 250명의 학자, 14개 지부, 11,704명의 세례교인을 얻게 되었다. Ibid., 150-151.
호주 원주민들은 아내 도둑질, 아내를 공동 소유하는 군혼(群婚), 유아살해의 관습이 있었다. 이 미개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05년 두 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호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라마훅에 학교를 세워 복음을 전했고, 옷 입는 것, 곡물 경작하는 것 등을 일일이 가르쳤다. 병원도 세워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모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Ibid., 151-152.
모라비안 선교회는 1732년부터 6대륙 개척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여 1930년까지 약 200년 동안에 세계 14개국에 3,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잠자던 개신교의 선교를 깨운 선구자적 선교 공동체로 쓰임을 받았다. 어떤 경우는 같은 가계에서 5세대에 걸쳐 선교사가 나오기도 했다. 인구 6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헤른 훝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호주를 제외한 전 대륙에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Ibid., 152.
소렌손이라는 사람은 “라브라도르에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구두 한 켤레만 준비된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목숨을 바쳐 선교전선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준기, 복음운동사, (광주: 광신대학교 출판부, 1998), 135-136.
UBF는 1961년 9월, 1960년의 4.19 학생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테타의 정치적 격변기에 전남 광주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다. UBF의 선교역사는 1969년 당시 서독에 돈 벌러 가는 세 명의 간호사들을 안수하여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Sarah Barry, “UBF World Mission History”, UBF World Missions (Chicago, 1998), 39.
이후에 해마다 간호사 선교사들이 서독 여러 도시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기숙사 방에서 모여 성경을 읽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로써 극한 외로움과 언어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후진국의 꽃다운 처녀들로서 감당하기 힘든 노동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동시에 사명감을 갖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독일 생활에 적응을 하고 언어를 습득해 가면서 믿음으로 캠퍼스에 나아가 독일 대학생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서독의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역사의 결과 5년 뒤인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1회 서독 UBF 수양회에 165명(한국 선교사 40명 포함)이 참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한 예로, 독일 본의 장(Chang) 선교사는 본(Bonn) 대학 박사과정 학생이었고 아내인 사라 선교사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정을 개방하여 베르너라는 히피 독일학생을 10년간 집에 데리고 살면서 사랑으로 섬기고 성경을 가르쳤다. 서독에 파송된 UBF 평신도 선교사들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령의 약속, 증인됨의 약속을 믿는 우직한 믿음으로 이렇게 했다. 그리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현지인 대학생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예수님께 자신의 생애를 헌신하는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독일 UBF에는 현지인 스탭 4명과 선교사들처럼 희생적으로 캠퍼스 선교를 섬기고 있는 60여 명의 헌신된 현지인 리더들이 세워졌다. 2009년 8월에는 1200여명의 유럽 선교사들과 현지인 리더들과 회원들이 독일 에링거펠트에서 모여 유럽선교 40주년 기념 선교대회를 가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