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봉사단원 피랍·피살 3년… 생존자들이 밝히는 악몽의 43일
입력 2010-07-23 22:48
“처형 상황 땐 제가 먼저…” 배 목사는 그렇게 희생됐다
꼭 3년이 지났다. 샘물교회 봉사단 23명은 마자르이샤리프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뒤 카불을 거쳐 칸다하르로 가는 길에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됐다. 43일간의 피랍기간 2명이 살해당했다. 교회는 비판받았다. 살아서 돌아온 피랍자들은 말을 아꼈다. 베일에 가려졌던 피랍 당시 현장으로 들어가봤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우리, 탈레반한테 납치당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2007년 7월 19일 오전 10시40분쯤 카불의 한식당 ‘뉴월드’에서 차를 바꿔 타고 출발한 지 40여분 만의 일이다. 23명의 봉사단원을 태운 버스는 ‘딱’ 소리 한 번에 멈춰섰다. ‘딱!’
임현주(당시 32세) 선교사는 다급하게 말했다. 총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딱!’ 정부군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자동소총(소련제 AK-47)을 들고 버스로 뛰어 올랐다.
차는 방향을 틀어 왼편의 마을로 들어갔다. 대전차 로켓 RPG 등으로 중무장한 탈레반들이 지켜선 가운데 봉사단원들은 한 줄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배형규(42) 목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당신들은 손님한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를 방문한 손님들입니다!” 임 선교사가 현지어로 쏘아붙였다.
2시간40분 정도를 걸었다. 어느 이슬람사원(마을회관) 앞에 도착했다. 3∼4명이 그들을 에워쌌다. 가운데는 칸다하르에 가져갈 짐이 잔뜩 쌓여 있었다. 탈레반은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푸는 가방마다 성경이 나왔다. “뭐냐”고 추궁하는 탈레반에게 봉사단원들은 “역사책”이라고 답했다. 그때 누군가가 휴대전화를 끄집어냈다. 희색이 만면했다. 탈레반의 정신이 팔린 사이 봉사단원들은 신속히 성경을 품안에 감췄다. 이번엔 회비가 들어있는 가방을 통째로 들고 나왔다.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려고 모아둔 달러였다.
“안심해라. 안심해라. 우리는 정부군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밤 달이 지면 어디론가 이동했다. 라이트도 켜지 않고 쫓기듯 달렸다.
21일 밤. 한국에 보내주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모두는 옷을 입고 신속하게 신발을 신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동이 트는 아침은 곧 절망이었다.
22일 일요일. 가로 10m, 세로 4m, 깊이 1.5m 웅덩이 앞에 서라고 했다. 발 디딜 공간은 30㎝뿐이었다. 초다리(자루)를 뒤집어 써 눈만 보이는 탈레반들. 총알을 엑스자로 온 몸에 감았고, 어깨에 박격포까지 메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구나.’ 전날 봉사단원들은 “저들이 한국군 철수나 더 큰 협상안을 갖고 나오면 우리는 살아나가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탈레반들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쓰러지거나 울지 않았다.
“우리는 탈레반이고 곧 알카에다다. 테러리스트는 너희와 미국이다. 우리는 신을 위해 이 성전을 계속할 것이다.”
탈레반은 봉사단원 모두에게 이름과 부모님 이름을 차례로 부르게 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최초의 동영상은 어디로도 유출되지 않았다. 아니 유출될 수 없었다. 탈레반은 캠코더 작동법을 몰랐다.
또 다른 밤. 트랙터로 ‘운반’된 지역은 광야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과 흙먼지 속으로 봉사단원들을 몰아넣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이 나타났다.
“한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온 선교사라는 걸 다 들었다!” 한국 언론에서 교회 출신 단기선교사라고 보도한 내용을 들었다고 했다.
귓전을 울리는 바람소리에도 노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임 선교사가 노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칸다하르 병원에 친구가 있다. 그를 도우려고 가는 사람들이다!”
23명이 함께 있던 어느 날 밤엔 배 목사가 봉사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큰 협상안을 갖고 나와서 본보기로 한두명은 처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제가 일어나겠습니다. 제 번호가 1번입니다.” 유경식(55) 장로가 나이 많은 자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배 목사는 “장로님, 제 자리 넘보지 마십시오”라고 웃으며 넘겼다.
며칠 뒤에 봉사단원은 각각 11명과 12명으로 나뉘어졌다.
25일 아침. 탈레반은 배 목사의 이름을 불렀다. “배형규.” 배 목사는 문 밖으로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배 목사가 세상을 떠난 그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팀은 계속 나뉘어졌다. 31일 또 다른 희생자가 나왔다. 심성민(29)씨였다. 경상도 사나이로 말수는 적지만 속정이 깊어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챙기던 그였다. 심씨 역시 탈레반들에게 끌려갔다.
서로의 생사를 알 길은 없었다. 유일한 버팀목은 함께 남은 동료들 그리고 성경뿐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8월 17일. 김지나(32) 김경자(35)씨가 무사 귀국했다.
그러나 세 번째 살해 위협이 시작됐다. 이번엔 여성이었다. 그들 율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전략상 가장 자극적인 살해극을 택했다.
막후 협상은 결국 탈레반의 다른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한국 측은 상당량의 음식과 의약품도 피랍자들을 위해 보냈다. 피랍자들은 풀려날 때까지 받아보지 못했다.
8월 29일. 아프가니스탄 피랍 41일째, 12명이 풀려났다. 다음날 남은 피랍자들이 풀려났다. 가즈니 적신월사에서 미군기지로, 동의부대로 이동은 계속됐다. 숙소인 세레나호텔에 도착해 2명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모두 오열했다. 9월 2일,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2주간 안양 샘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데는 반년에서 1년 가까이가 소요됐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