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 견디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애수…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입력 2010-07-23 17:56
여기, 나무에게서 치욕을 읽어내는 시인이 있다. 여름이면 사람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주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안을 느끼게 하는 나무에게서 치욕을 읽어내다니. 역발상이 아닐 수 없다.
“꽃이 피었다,/도시가 나무에게/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속마음을 감추는 대신/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나무는 나의 스승/(중략)/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치욕으로 푸르다”(‘나무의 수사학1’ 일부)
손택수(40·사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은 발상의 전환으로 가득 찬 한 그루의 늠름한 나무 그 자체다. 그는 농경문화적 상상력을 축으로 한 전작들과 달리 내성을 갖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도시적 서정을 펼쳐 보인다. 도시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치욕을 견디는 일에 다름 아니다. 밥줄을 쥐고 있는 도시라는 괴물의 등짝에 붙어 자라는 나무는 어쩔 수 없이 꽃을 피우는데 이 꽃이야말로 치욕을 견디는 반어법인 것이다.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수채’ 첫 연)
시인은 직장이 있는 망원역에서 퇴근하던 차에 석양이 빌딩 외벽과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목격한다. 정작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머물다가는 시간, 모든 게 붉은 빛에 감겨 묽어지는 풍경에서 시인은 도시인으로서의 일상을 수락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연한 애수를 보여준다.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수채’ 마지막 연)
묽어지고, 흐릿해지고 있는 풍경에서 시인은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들여다본다. 지난 5년간 그가 겪은 사연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정말 힘들었겠구나’, 하는 짧은 탄식이 새어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번 시집은 손택수가 시업을 통해 그동안 획득한 색채를 애써 흩뜨린 고뇌를 보여준다.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문법을 지우면서 새로운 말들을 견인하는 고투의 흔적들이 빛난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