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광부 인감도장 신용카드처럼 쓰여
입력 2010-07-22 17:43
탄광촌 풍속 이야기/정연수/북코리아
어느 날 낮 한 광부가 곤히 잠을 자다가 어린 아기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깼다. 잔뜩 신경질이 난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비명을 질러 그는 다시 깼다. 그가 던진 것은 그토록 귀여워하고 사랑하던 자신의 아기였다.
1980년대 장성광업소 압축기실에 근무하던 한 노동자의 경험담이다. 다행히 포대기에 싸인 덕분에 아기는 다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동료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가 이토록 예민했던 것은 광부들의 업무 스케줄 때문이었다. 광부들은 갑방(甲方, 오전 8시∼오후 4시), 을방(乙方, 오후 4시∼자정), 병방(丙方, 자정∼오전 8시) 이렇게 3교대 근무를 했다. 1주일을 주기로 밤낮이 바뀌는 3교대 근무는 생체리듬 파괴로 신체적 고통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이들이 일하는 곳은 암흑보다 더 어두운 탄광이었다. 탄가루가 흩날리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다 툭하면 사고로 떼죽음을 당하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했다. 가장 사고가 많던 1970년대에는 한 해 평균 25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에라, 이것도 망하면 탄광에나 가지.” 한 때 유행하던 말이었다. 탄광일을 만만하게 보는 마음이 깔려있는 말이지만 동시에 막다른 골목에서 인생의 마지막 반전을 노릴 수 있는 최후의 기회로 인식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탄광에서 일하는 건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탄광이 호황이던 70년대 광부 경쟁률은 50대 1에 달했다. 탄광에 취직하는 것만으로도 큰 벼슬을 한다고 여겨 광부 취업브로커까지 있을 정도였다.
탄광촌에서는 개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특히 신체검사가 까다로워서 광부 신체검사를 통과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건강한 남자라는 말이 생겨났다. 광부들은 ‘대통령 하사품’이라는 명찰이 박힌 방한복을 입을 정도로 우대 받았다. 그들의 인감도장은 신용카드 역할을 해 뒷주머니에 인감만 차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는 말도 생겨났다. 일은 고됐지만 그만큼 보상도 있었다.
그럼에도 광부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광부가 되려고 광산으로 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농촌출신이거나 도시에서 실패한 후 재기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짧은 시간에 목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고향은 점점 멀어졌다. 돈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지만 산업화로 농촌이 몰락하면서 갈 곳도 없어졌다. 보수가 좋았지만 돈을 모으지 못한 것은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술로 탕진하는 돈이 많았기 때문이다. 탄광에 온 지 얼마 안 된 이들은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면서 갱도의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탄가루를 씻어내려 마시고, 삶이 절망적이어서 마시고, 죽은 동료가 생각나서 마셨다. 자연히 대포집, 니나놋집, 방석집으로 불리는 술집이 탄광촌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광부의 아내들 사이에선 ‘3000만원짜리 검은 돼지’라는 농담이 유행했다. 갱도에서 일하는 남편이 죽으면 3000만원의 보상금을 받는다는 데서 시작된 말이다. 광부는 돈을 잘 벌어온다는 의미에서 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일하느라 새카맣게 돼버린다고 해서 검은 돼지라고 불렀다. 아내들은 남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함을 “우리 집에 3000만원짜리 검은 돼지 있다”는 농담으로 만들어 표출한 것이다.
광부의 아내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것이 남편을 기준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탄광촌에서는 ‘하늘같은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는 말이 신앙처럼 확고했다. 탄광촌에서는 여자가 남자 앞길을 가로지르는 것조차 금지됐다. 매일같이 준비해야 하는 도시락은 아내들에게 고역에 가까웠다. 시간을 맞추는 것도 그랬지만 매끼 다른 반찬을 준비하는 것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한 광부의 아내는 “갱내에서 힘든 일 하다가 먹는 도시락이라 생각하면 몹시 신경 쓰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니 그것도 눈치가 보여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도시락은 항상 청색이나 홍색 보자기로 쌌다. 안전을 기원하는 일종의 금기였다.
태백탄광촌이 고향인 저자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막장정신은 광부들이 절망적 삶을 딛고 일궈낸 희망의 철학”이라며 “산업시대를 뜨겁게 살아온 탄광촌의 삶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원천을 발견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