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 민중의 가슴에 희망을 새기다

입력 2010-07-22 17:31


‘오윤 전집’ 오윤전집간행위/현실문화

서울 종로통을 동대문 방향으로 걷다보면 종로4가 초입의 상업은행 (현 우리은행) 동대문지점 외벽을 장식한 황토빛 벽화를 만나게 된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상징이었던 조각가 오윤(1946∼1986)의 부조 벽화다. 상업주의를 거부하여 작품에 사인조차 남기지 않았던 장외(場外)작가가 은행벽화를 제작하게 된 데는 사연이 없을 수 없다.

거기엔 남모르는 아버지(소설 ‘특질고’로 필화사건을 겪은 작가 오영수)와 아들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아름다운 우정이 있었다. 오윤의 대학동창인 임세택(전 서울미술관장)은 당시 상업은행장이었던 아버지 임춘석에게 “건물 벽을 경복궁 자경전의 담처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임춘석은 동대문, 구의동, 삼각지 세 은행지점의 외벽을 장식하는 프로젝트를 오윤에게 맡겼다. 프로젝트는 오윤을 비롯,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의 아들 윤광주, 오경환(동덕여대)이었다. 이들은 윤경렬의 집인 경주 고청공방에서 흙을 구웠고 1974년 건축가 조건영이 배 모양으로 지은 건물의 준공에 맞춰 작품을 완성했다. 은행 벽면은 가로·세로 30센티미터, 두께 3센티미터 짜리 전돌 1000여개로 빼곡히 채워졌다. 멕시코 민족미술에 심취해 있던 이들 젊은 예술가들은 테라코타 벽화를 통해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오윤. 그를 ‘화단의 신동엽’으로 명명한 이는 미술평론가 김윤수였다. 오윤은 관념적으로 민중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항상 낮은 데로 향하고 있었고 그 스스로가 민중이었다. 그는 민중이니 의식화니 하는 당시 운동권 지식인이 즐겨쓰던 언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운동가요를 즐겨 부르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그는 보통사람들의 애창곡을 유난히 좋아했다. 간드러지게 넘기는 트로트 노래에 맞춰 고개를 살랑살랑 젖는 품은 늘 주변 사람들을 흥겹게 만들었다.

그는 동네의 노동자, 노인들의 친구였으며 그에게 그들은 의식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형님, 아우 하는 사이였으며 스스럼없이 지내는 진정한 이웃이었다. 그의 예술은 무슨 척하면서 나대지 않았다. 교훈적이지도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포용하는 마음 씀씀이, 움찔하게 만드는 생동감으로 가득찬 인간이었다. 10대 때부터 전국을 여행하며 각지의 풍물을 몸으로 익힌 그는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무언가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에게 전통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였다. 춤이든 굿이든 그것은 삶의 한 표현이었고 사람답게 살아보기 위한 놀이이자 의식이었다.

18세 때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전국을 여행하며 재기를 꿈꾼 오윤. 외가인 부산 동래에서 ‘동래학춤’을 잘 추던 외삼촌을 만나 외가의 내력과 학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이듬해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 대학 선배인 시인 김지하, 화가 변종하의 권유로 제3세계 미술로서 멕시코 미술에 대해 토론하며 그들의 민족적 사회적 리얼리즘의 세계와 벽화라는 형식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79년 ‘현실과 발언’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래 우리 전래의 고판화 자료 수집에 전념하는 한편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 판소리와 육자배기를 배우고 북춤에 심취했던 오윤. 86년 5월 지병이었던 간경화로 몇 차례 혼수를 거듭한 끝에 서울 쌍문동 자택에서 누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생은 짧았지만 그의 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24주기를 맞아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은 전집(전3권)을 펴내 그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에 이른다. 오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시인 김지하부터 후배 판화가인 이철수까지 오윤의 곁에서 함께 했던 인물들과 주재환, 손장섭, 김정헌 등 ‘현실과 발언’ 동인들이 생전의 오윤에 대해 그의 예술 세계는 물론, 인간적인 면모까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권 ‘세상사람, 동네사람’은 성완경, 유홍준의 평론 등 35명의 글이 실렸으며 80년 10월 17일 ‘현실과 발언’ 창립전과 82년 덕수미술관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전을 즈음해 발간됐던 동인지에 실렸던 오윤의 글 등도 새로 소개된다. 2권 ‘칼을 쥔 도깨비’는 오윤의 작품 도판으로 구성됐다. 판화는 물론, 회화와 조소, 그리고 판화를 찍는 원판 작품도 수록됐다. 20주기전 때 일부가 소개됐던 드로잉은 3권 ‘3115, 날 것 그대로의 오윤’으로 따로 묶였다. 총 3115점의 드로잉 중 700여점을 추려 엮은 것으로, 2권의 작품집과 연결지어 드로잉과 작품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전집 간행위원회는 “오윤은 이미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아직 다양한 비평언어의 프리즘으로 투과되지는 못했다”며 “민중미술의 상징적 존재인 오윤을 오늘의 미술 현실로 불러들이는 것은 미술의 정치성을 둘러싼 담론을 위해서도, 우리 현대미술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