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추상화 앞에서 당황하지 마세요”
입력 2010-07-22 17:29
‘아버지의 정원’ 펴낸 정석범 교수
“대중들이 미술을 어려워하지 않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책을 펴내려고 했습니다.”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 기행’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홍익대 미대 정석범 교수가 2탄 격인 ‘아버지의 정원-어느 미술사가의 그림 에세이’(루비박스)를 출간했다. 미술을 즐기고 싶지만 칸딘스키의 추상화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당혹스러워지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쳐보자. 미술은 그렇게 어렵지도, 어렵게 느껴야 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든 것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보이는 법이지만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무리 역사상 걸작이라 해도, 개인들에게 주는 느낌과 감동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미술사가인 저자도 마찬가지. “그림을 보다 보니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이 오버랩됐고, 그 느낌을 독자들에게 진솔하게 전해주려고 했습니다. 미술은 전문가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일본 회화작가 안도 히로시게가 그린 ‘쇼노’. 들판에 내린 장맛비를 피하는 농부들이 그려진 풍경화다. 삿갓이나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걸음을 재촉하는 농부들의 발놀림과 거센 빗줄기, 바람에 고개를 수그린 나무의 모습이 담겼다. 목가적인 시선을 갖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그림 속에서 저자가 읽는 것은 뜻밖에도 원주천이 범람하는 장면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징검다리로 원주천을 건너던 한 소년이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 자신 한탄강에 빠져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는 물 근처에 얼씬도 못했던 경험도 있다. 충격으로 남았던 기억이, 비 오는 날을 그린 서정적인 풍경 속에서 떠오른 것이다.
강렬한 색채의 향연을 보여주는 칸딘스키의 추상화도 새롭게 해석된다. 어린 시절 빙글빙글 흔들리는 비행기 모형 놀이기구를 탔다가 눈앞의 모든 형체가 해체돼 보이던 경험을 가진 저자는 칸딘스키의 ‘즉흥6-아프리카’를 보고 옛 기억을 떠올린다. 비행기 안에서는 사물의 정확한 모양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비치는 색채만 보였었다. 전통적 회화에서 탈피하고 화가의 즉흥적 감흥을 면과 색채로 표현한 추상화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순간이다. 책은 같은 방법으로 터너, 마티스, 고흐, 고야, 앵그르, 젠틸레스키, 프리다 칼로 등 거장들의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뭉크의 ‘절규’를 보면서 인간의 정서적 피폐를 읽어내든, 어린 시절 들었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떠올리든 그건 감상자의 자유다.
미술사 책을 보면서 미술을 배우려고만 했던 이들이라면 생각을 조금 바꿔 그림을 가만히 응시해보는 게 어떨까. 예술은 공부하는 이가 아니라 향유하는 이에게 기쁨을 주는 법이다. 책 속에 인용된 그림들은 모두 생생한 컬러로 실려 있어 감상의 즐거움을 더한다. 정 교수는 말한다. “전문서적을 덮고 미술을 있는 그대로 즐기세요.”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