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약속 못지키고…비운의 복서 배기석 끝내 숨져

입력 2010-07-22 00:28

“할머니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꼭 챔피언이 돼서 돌아올게요. 챔피언이 되면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잘 살 거예요.”

가난해도 항상 듬직했고, 성실했던 큰손자는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경기 후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던 프로복서 배기석(23·부산거북체육관)이 끝내 숨을 거뒀다. 지난 17일 충남 예산에서 가진 한국 슈퍼플라이급(52.160㎏) 타이틀 매치에서 8회 TKO패를 당한 뒤 병원으로 이송돼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은 지 나흘 만이다.

가족과 지인들에 따르면 배기석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79), 남동생(22)과 함께 열심히 살아온 것으로 드러나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그 직후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 할머니와 한 살 어린 동생과 함께 생활했다. 책임감이 남달랐던 배기석은 공고를 나오자마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금속을 깎는 금형업에 취업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샌드백을 두들겼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월급을 모두 할머니 통장으로 입금했으며, 대학에 진학한 동생의 학비도 전적으로 책임을 졌다. 낮에 힘든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 야간 연습을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던 배기석은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2003년 프로에 데뷔할 때에는 최우수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배기석의 동생은 “나중에 잘돼서 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잘 살자고 했다”고 울먹였다.

한국 프로복싱을 관장하는 한국권투위원회(KBC)는 배기석의 유족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KBC는 “배기석은 건실한 청년인데 운명을 달리해 유족을 돕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KBC는 홈페이지(koreaboxing.co.kr)에 은행 계좌와 안내 전화 등 접수처를 공지했다.

한편 국내 프로복싱계에서 경기 후 선수가 사망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08년 1월 최요삼에 이어 2년 6개월 만이다. 1982년에는 김득구가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레이 맨시니(미국)에게 14회 KO 패한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나흘 만에 사망한 바 있다.

모규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