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장희] 게이트 다시 보기
입력 2010-07-21 17:47
1999년 6월 3일에 치러진 재선거에서 당시 여당은 참패했다. 송영길 현 인천시장이 ‘젊은 피’로 여당에 긴급 수혈돼 후보로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던 바로 그 선거다.
선거 직전에 불거진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이 외환 위기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해가던 김대중 정권에 쓰라린 패배를 안긴 것이다. 당시 정국을 뒤흔든 옷 로비 사건은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된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인 이형자씨가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에게 수천만원대의 옷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 제기로 시작됐다.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연일 국정조사와 특검을 요구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이 사건을 두고 동교동계와 김중권 비서실장 등 ‘신주류’의 권력투쟁 산물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사건이 정권의 도덕성 문제로 비화되고 있었음에도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옷 로비 의혹을 “언론의 마녀사냥”이라고 규정해버렸다. 하지만 이 발언은 오히려 국민 여론을 악화시키는 촉매제만 됐다.
사상 초유의 특검까지 거친 끝에 이 사건은 ‘실체 없는 해프닝’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초동대응에 실패한 여권에 이 사건은 재선거 참패 이상의 아픔을 남겼다. 서민들이 IMF 후유증에 신음하고 있는 동안 고관대작 부인들은 값비싼 모피 코트를 사러 몰려다닌다는 이미지를 심어줘 국민들과 정권을 정서적으로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현 정권도 11년 전처럼 재·보궐 선거를 앞둔 시점에 권력형 비리 의혹에 휩싸여 있다.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있었고, 정권 내 영포(영일·포항)라인이 이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금융권 인사에도 관여했다는 이른바 ‘영포게이트’ 관련 의혹이다. 국정조사와 특검을 요구하는 야당이 곶감 빼먹듯 제보 내용을 하나씩 폭로하는 상황과, 여권 내 권력암투의 산물 등 해괴한 얘기들이 터져 나오는 것도 11년 전과 유사하다.
문제는 정권의 대응 방식마저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에 대해 “어설픈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해석에 따라 이 사태를 ‘몇몇 사려 깊지 못한 공무원들이 저지른 권력 남용’이라고 국한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또 야당이 영포라인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이상득 의원은 “영포회가 무슨 범죄 집단처럼 취급받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이번 사태를 야당 또는 여권 내 반대파의 정치공세 정도로 취급해버렸다.
물론 영포라인의 인사 전횡은 실체가 없고,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도 몇몇 공무원의 ‘오버’가 낳은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의혹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불통으로 인한 답답함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그때와는 또 다르다. 과거 군사정권을 경험했던 40대 이상 국민들은 ‘혹시 나도 사찰 받고 있지 않나’하는 원시적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공직사회도 요동치고 있다. 일부 공무원들은 승진 못한 이유를, 징계 받은 이유를 영포라인 탓이라며 야당 의원실에 제보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정권은 제대로 감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음주 치러지는 재·보선은 지방선거에서 완패한 여당에겐 만회의 기회다. 앞으로 2년 가까이 전국 단위 선거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재·보선 승리는 더 절실하다. 하지만 지방선거 패배 이후 여권이 치른 전당대회나 수습책으로 내놓은 청와대 인사는 국민들에게 감동을 못 줬다는 게 중평이다. 개각 역시 재·보선 이후로 미뤄졌다고 한다.
과거 정권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옷 로비 사건의 교훈은 다름 아닌 ‘민심’을 등져서는 정치도 통치도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정권 차원에서는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옷 로비 사건이 정권의 안위를 뒤흔든 사건으로 변한 것도 결과적으로 민심을 등한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권 핵심 인사들이 되새겨볼 만한 얘기다.
한장희 정치부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