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입력 2010-07-20 17:09
[미션라이프] 그의 삶의 중심은 한국이었다. 1949년 7월 29일 인천항. 백발의 서양 노인이 미해군선에서 내렸다.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난 지 40년 만의 귀환이었다. 제물포를 처음 밟았던 23세의 혈기왕성했던 청년은 86세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한 달 동안의 항해였다. 당시 AP통신 기자가 감회를 물었다. 그는 “나 헐버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심장 깊숙이 한국 혼이 박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렇게 오고 싶었던 한국에 도착한지 1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1886년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 이야기다. 헐버트에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책은 선교사,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학자,역사학자,언론인으로 조선의 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헐버트는 조선에 오자마자 교육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고 육영공원 교사, 한성사범학교 교장, 경기고 전신인 관립중학교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과체계를 정착시키고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1889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했고,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해 세계에 알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또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시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선교사 등과 함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고,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황제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도 일했다.
아울러 그는 한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해 국제적으로 알렸다. 15년에 걸친 한민족 탐구를 통해 ‘한국사’와 ‘대한제국멸망사’를 출판했다. 그는 책에서 한민족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고 두뇌가 우수한 성공잠재력이 큰 민족으로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의 탄생과정에 서재필을 도왔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것은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 독립신문 창간호에 찍힌 금요일이 실제로는 화요일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또 책은 헐버트가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할 것입니까?’란 제목의 진술서를 미국 상원에 제출하면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한 자료를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해 책에 사진과 함께 제시했다.
또 고종황제가 해외 은행에 맡겼다가 일본에 빼앗긴 거액의 내탕금에 관한 내용도 관심을 모은다. 책에 따르면 고종황제는 1903년 12월 서울에 있는 독일공사관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소재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에 51만 마르크를 맡겼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 총 세입의 1.5%나 되는 큰 돈이었다.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현재 가치는 약 2조원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일제가 탈취해간 이 돈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동분서주했던 헐버트의 눈물겨운 노력을 평전에서 살려낸다. 덕화은행장이 써준 예치금 영수증, 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실체적 증거도 책에 실려 있다. 내탕금의 예치 과정, 고종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위임한 경위, 일본이 예치금을 탈취한 과정과 이를 되찾기 위한 헐버트의 분투, 광복 후 한국 정부가 이 사실을 헐버트로부터 전해 듣고 취한 행위 등이 생생하게 복원돼 있다. 헐버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이 이자까지 쳐서 이 돈을 꼭 받아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평소 아리랑을 즐겨 불렀다는 헐버트는 자신이 졸업한 다트머스 대학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에 자신의 삶이 곧 한국 사랑임을 고백했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썼을 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이었다(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김동진/참좋은친구).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이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