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12년간 투쟁 끝 사죄·배상 받아… “한국도 승리하길”
입력 2010-07-20 18:41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4부 국치 100년, 이젠 해법 찾아야
② 전범기업에 승리한 중국인 피해자들
사오이청(邵義誠·85) 노인은 울고 또 울었다. 이제는 백발 밖에 남지 않은 고령이지만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23일 일본 중견 기업 니시마츠건설(西松建設) 측과 화해가 성립된 뒤 다른 피해자 및 유족들과 보고집회를 가지는 자리에서도 그랬고, 축하연회를 가지면서 또 그랬다. 이제 다 됐다는 만족감과 기쁨에 젖어 어깨를 들먹였고,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연락이 두절된 다른 노인들이 안타까워 흐느꼈다.
사오 노인을 비롯한 중국인 노무동원 피해자 360명은 태평양전쟁 시기 강제동원을 자행했던 일제 전범기업과 지난해 10월 극적 화해를 이뤘다. 가해자인 니시마츠건설 측은 일본 특유의 애매한 수사(修辭)가 아닌, 명백하고 직접적인 사죄를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적으로 실천했다. 단계적으로 보상금도 지급했다. 금액은 총 2억5000만엔(당시 약 32억원). 피해자들은 1943년에서 1945년 8월 종전(終戰) 때까지 니시마츠건설에 의해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야스노(安野)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으로 끌려갔던 노무자 또는 그 유족이다.
또 다른 중국인 183명도 올 4월 같은 기업과 화해를 이뤄냈다. 니가타(新潟)현 시나노가와(信濃川)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혹사당했던 노무자 출신이다. 이들 역시 사과와 함께 화해금 1억2800만엔(약 15억2000만원)을 받아냈다. 니시마츠건설은 야스노 발전소 노역 피해자들과 과거사를 정리한 것을 계기로 시나노가와 발전소 피해자들에게도 깨끗이 보상했다.
사오 노인은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롭다. 그 일은 지난했지만 결과에 만족한다. 이제 괴로운 과거사로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늙은 육신을 뒤척이는 일은 없다. 중국 톈진(天津)시 베이천(北辰)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지난 5일 취재팀을 만난 사오 노인은 느리지만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그간의 과정을 얘기했다.
“우리의 피와 눈물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화해하고, 사죄도 받았고, 게다가 기념비도 건립하기로 해서 전체적으로 만족합니다. 기념비 건립과 추모 행사 비용 등을 빼고 1인당 60만엔, 2009년 인민폐로 환산하면 4만5300위안을 받았지요. 도시 사람들에게는 큰돈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농촌 사람들은 그 돈으로 집 두 채를 지을 수 있어요. 허허.”
사오 노인은 지난해 4월 다른 피해자들과 배상 문제를 논의하느라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 갔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10일간 입원한 일이 있지만 건강은 대체로 좋아보였다. 그 후유증으로 다소 손을 떨며 건네는 명함을 받아보니 ‘히로시마 야스노 수난자 연합회 사오이청’이라고 써 있었다. 그는 연합회 대표를 맡고 있다. 어쩌다 히로시마까지 끌려가게 됐을까.
“그때가 1944년 7월이고, 내 나이 열아홉이었어요. 톈진에서 담배를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지요. 아버지가 이미 1년 전 일본군에 끌려간 뒤 소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만 있었으니까. 하루는 칭다오에 담배를 사러 기차를 타고 갔는데, 역전으로 나오자마자 일본군 지시를 받은 중국인 부랑자들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노동자협의회’라는 이름의 사무실에 끌려가 1주일간 잡혀 있었어요. 거기 사람들이 ‘안 가면 죽는다’고 협박해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됐습니다. 일본에 끌려간 중국인 노동자가 4만명이나 되던 시절이지요.”
당시 사오 노인과 함께 끌려간 일행은 360명이었다. 칭다오에 있던 군인 포로가 300명이고, 나머지는 사오 노인처럼 그 일대에서 마구잡이로 붙잡힌 민간인이었다. 출발할 때까지도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1주일간 배를 타고 갔다. 항구에 도착해 일본인 인솔자를 따라가 보니 히로시마현 야스노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이었다.
“발전소 근처 산의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는 수로가 있었는데 거기 돌이 많았어요. 돌을 밖으로 치우고 정비해서 물이 잘 흐를 수 있도록 하는 노동을 맡았지요. 수로 길이가 약 8㎞이고, 그 수로를 따라 흐른 물이 발전소를 돌렸습니다. 작은 돌은 혼자, 큰 돌은 두 사람이 같이 들었는데 늘 맨손으로 일했어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하루 2교대였지요. 잠은 나무로 만든 숙소에서 땅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잤고, 내용물이 없는 작은 떡 같은 음식에 소금을 먹었습니다. 작업복도 안 줘서 처음 끌려갈 때 입었던 여름 옷 한 벌을 겨울에도 계속 입었어요.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는 노역하다 크게 다쳤다. 돌이 무거워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단 한 번도 치료를 못 받아 상처가 곪고 다른 부위까지 전이되면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앓아누웠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마구 빠졌다. 니시마츠건설 측은 1945년 3월 사오를 포함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못하는 환자 13명을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임금 한 푼 못 받은 채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그는 병 치료에 꼬박 2년을 보냈다.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의 방 두 칸을 팔았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강제동원 과정에서 동료 29명이 객사했다. 처음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3명이 병으로 죽고, 26명은 노역 중에 또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때 목숨을 잃었다. 두 눈을 실명(失明)한 이도 있다.
종전 후에도 일본 측에 항의할 생각을 못하고 그저 생존의 시름 속에 세월을 흘려보냈다. 불행했던 시간을 지우고 싶어 부인과 자식 누구에게도 강제동원 사실을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1996년 한 대학교수가 찾아왔다. 마침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이 교수는 “가족 중 일본에 끌려갔던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부인과 자식들은 그런 사람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튿날 다시 찾아와 사오 노인을 만났다.
“일본의 학자들과 시민단체 사람들이 히로시마 원폭 사망사건을 조사하다가 중국 노동자들도 죽은 걸 알게 됐답니다. 니시마츠 강제노역 건을 찾아낸 것이지요. 이 분들이 중국인 학자들과 힘을 모아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됐습니다. 그래서 나한테도 찾아왔고요. 자료를 보여주면서 신청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업을 상대로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슈강(修剛) 톈진외국어대 총장 등이 동참해 피해자들을 하나하나씩 찾았다. 진술과 증거를 확보하고 1998년 1월 사오 노인을 비롯한 피해자 대표 5명을 원고로 해서 니시마츠건설 측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청구시효(10년)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항소했다. 2심에서는 “현저한 인권침해에 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권리 남용”이라는 판결을 받아내 승소했다. 하지만 피고인 니시마츠건설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3심까지 끌고 갔다. 결국 2007년 4월 27일 도쿄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 해당)는 1972년 체결된 ‘중일공동성명’으로 중국인 개인은 피해보상 청구권이 없다며 최종적으로 니시마츠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나카가와 료지(中川了滋) 재판장은 판결을 내리면서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은 원고들의 피해 구제를 위한 관계자의 노력이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측은 이에 힘입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업 측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했다. 니시마츠건설은 판결 직후 “더 이상 문제될 게 없다”던 자세에서 점차 벗어나 피해자들과의 협상에 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해 10월 23일 양측은 도쿄 간이재판소에 화해신청서를 제출했다. 니시마츠건설이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 ‘깊은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 피해 보상과 실종자 조사, 기념비 건립 등을 위해 2억5000만엔의 구제기금을 신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배상금’이냐 ‘구제금’이냐는 명칭 문제를 놓고 양측이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피해자 측이 한발 양보해 구제금으로 정리했다. 무려 12년에 걸친 소송과 협상. 사오 노인은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니시마츠 측에서 공개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진심으로 사죄했고 이를 일본 언론 매체에서 모두 보도했습니다. 기념비는 원래 올해 5월에 짓기로 했는데, 10월로 연기됐어요. 장소를 정하는 데 다소 문제가 있어서.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그 발전소 인근에 짓기를 원하는데, 지금 발전소 소유권이 니시마츠 측에 없다는군요. 그러나 어쨌든 다시 장소를 물색해 중국인 노동자 360명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건립하게 될 것입니다.”
사오 노인의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부러웠다. 한국의 피해자들은 언제쯤 저렇게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중국 피해자들은 보상금이 적어 다소 불만이라고 하지만, 일제 때 미쓰비시(三菱)중공업 작업장에 끌려갔던 한국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커피 한 잔,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99엔을 받고 분노와 통한의 눈물을 흘린 바 있다. 한국에서는 당신과 비슷한 나이의 할머니들이 겨우 99엔을 받은 일이 있다고 사오 노인에게 얘기했다. 그는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무 적군요. 도대체 어느 기업인지 모르겠지만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적은 돈을 줄 수 있나요…. 중국에서는 우리 360명과 또 다른 183명의 두 그룹이 화해하고 배상을 받았어요. 한국인 피해자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꼭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베이천(톈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