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식물이야기] 도깨비불 키우는 왕버들
입력 2010-07-19 18:35
‘도깨비나무’라는 별명의 나무가 있다. 납량특집 드라마가 한창인 한여름 밤이면 나무 주위에 희부윰한 도깨비불이 번쩍거리며 날아다니는 까닭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드라마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농촌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도깨비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이 나무는 경기도 이남 지역에서 잘 자라는 버드나무 종류의 하나인 왕버들이다. 버드나무 종류의 나무들은 모두 물과 친한 성질이어서 대개는 개울이나 연못 가장자리에서 자란다. 그러다보니 나무줄기는 습기가 가득차 있게 마련이다. 마를 새 없는 나무줄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썩어들기 쉽다. 특히 비가 많이 내려 공기가 습한 여름이면 부식은 더 심해진다. 그러다보면 줄기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구멍이 바로 도깨비 소굴이다.
하루살이를 비롯해 여름철 날벌레들이 우연찮게 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구멍은 생각보다 깊어서 어두운 안쪽에 들어간 벌레들은 일쑤 되돌아나오는 길을 잃곤 한다. 하릴없이 어두운 구멍 안에서 시체가 되어 쌓이게 된다. 때로는 들쥐와 같은 설치류도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벌레나 설치류의 시체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인(燐) 성분이 있는데, 성냥의 원료로도 쓰이는 인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에 더 반짝거린다. 게다가 이 음울한 빛은 흐르는 바람을 따라 춤추듯 흔들리는데, 이 빛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던 옛 사람들은 이를 도깨비불이라고 부른 것이다. 도깨비불이 살아 머무는 왕버들을 도깨비나무, 혹은 ‘도깨비버들’이라고 했다. 한자로도 ‘귀류(鬼柳)’라고 썼다.
물과 친한 왕버들은 심지어 연못 한가운데에서도 잘 자란다. 영화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진 경북 청송의 주산지는 오랜 세월 연못 속에서 크게 자란 여러 그루의 왕버들을 볼 수 있다.
흔히 버드나무를 이야기하면 가지가 땅으로 길게 늘어지는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버드나무 종류에는 버들피리를 만드는 데 쓰는 갯버들, 가지가 배배 꼬이며 솟아오르는 용버들을 비롯해 40여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왕버들은 가지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오르며 사방으로 넓게 퍼져 그늘을 짓기 때문에 농촌에서 정자나무로도 많이 심어 키운다. 크고 굵은 줄기로 웅장하게 자라는 왕버들은 왕의 기품을 갖춘 우리의 대표 버드나무라 할 만하다.
천리포수목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