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귀신고래의 꿈
입력 2010-07-19 18:06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잘못 전달했거나, 시청자들이 잘못 받아들인 상투적 인식 가운데 대표적인 게 자연계의 지배질서를 약육강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게 돼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더 큰 생태계의 맥락에서 볼 때 사자는 얼룩말보다 훨씬 더 취약한 존재다. 사자의 사냥 성공률은 15% 안팎에 불과하고, 많이 낳지도 못하는 새끼가 성체로 살아남을 확률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반면 얼룩말이 평생 사자에게 희생될 확률은 사자가 처한 굶주림 등의 위험보다 훨씬 더 적다. 얼룩말은 안정적 개체수를 유지한다.
이렇듯 피라미드형 먹이사슬의 상위를 차지하는 포식자들은 환경이 크게 훼손되거나 천재지변의 징후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멸종의 위기에 처한다. 사자뿐 아니라 범고래를 비롯한 많은 고래류, 수리부엉이, 수달 등이 다 비슷한 운명이다.
최근 울산 앞바다에서 고래가 자주 발견되면서 ‘고래바다여행선’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한다. 19일 울산광역시 남구에 따르면 7월 여행선 예약은 매진됐고 8월 말까지 예약률도 83%에 달했다.
동해에서 40여 년째 보이지 않던 귀신고래를 목격했다는 민간어선의 신고도 최근 접수됐다. 귀신고래는 북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무리와 동북아시아 연안을 따라 이동하는 무리가 있다. 북미 연안을 따라 회유하는 개체군은 20세기 들어 보호되면서 현재는 2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계라고도 불리는 동북아 회유군의 개체 수는 100여 마리에 불과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이처럼 대양을 누비는 고래는 옛날부터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숱한 소설, 영화, 노래의 소재가 됐다. 예컨대 혹등고래는 여름을 추운 고위도 지방에서 나고, 겨울에는 번식을 위해 열대나 아열대로 회유한다. 연간 회유 경로가 약 2만5000㎞인 혹등고래는 미주 서해안을 남하하는 수개월간 굶었다가 남극해에 도착하면 크릴새우를 포식한다. 그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다. 출산한 후 새끼와 함께 북반구로 돌아갈 때에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무자비한 범고래에게 새끼를 빼앗기기도 한다.
바다에서 무적인 범고래도 해양 오염엔 속수무책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에 따르면 살아 있는 범고래에서 채취한 피하지방에서 수은 등 중금속과 다이옥신 등 잔류성유기오염물이 엄청나게 많이 검출됐다. 과학자들은 “범고래는 그대로 놔 둬도 금세기 안에 멸종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울산의 고래관광이 성공하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우선 올 들어 약 30%(44회 출항에 13차례 목격)에 그치고 있는 고래 목격률을 선진국 수준인 5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동해안에 고래 개체수가 늘었다고 막연히 추정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방증이다. 폐기물의 해양 투기부터 속히 중단해야 한다.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등 대형 회유성 고래가 돌아온다면 동해안 생태계가 건강해졌다는 신호도 될 것이다.
또한 고래 관광과 고래고기를 먹는 관행은 양립하기 어렵다. 울산에서는 고래고기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 동해안의 고래들은 헷갈린다. 박수 치는 관광객과 작살 던지는 어부 가운데 누가 진정한 사람이란 말이냐. 과거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던 일본과 한국에서 고래 고기를 먹는 행위는 음식문화로서 비난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백질 공급원이 넘쳐나고, 고래의 상업적 포획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에 가입한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적어도 울산에서는 고래고기 음식점의 전업을 유도하거나, 다른 곳으로 집단 이주시킬 필요가 있다.
고래잡이와 고래고기 유통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동해안에 고래가 크게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체계적 모니터링이 이뤄지지 않아서 증감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쯤 동해안에 귀신고래가 다시 몰려와 3m의 고래분수(물기둥)를 뿜어내는 장관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한국계 귀신고래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임항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